이방원이 회령의 맹가첩목아 포함해서 경원이남을 고려조에 점령한 공험진 이남이라 하여
그 밑의 여진족 포함해서 모두 조선의 땅으로 인정해 달라고
명에게 표문을 올린 후, 영락제의 사신 파견과 맹가첩목아의 조선 귀화?로 동북쪽 국경은 두만강 라인을 확보하게 됩니다.
실상 완전히 두만강 라인을 조선의 국경으로 확보한 것은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이었지요.
공험진을 경원으로 해야 이성계 당시 맹가첩목아가 있던 회령과,
이성계의 조상들이 원 관리를 할 때 있던 경흥을 안전하게 획득할 명분이 생기는 셈이지요.
세종에게도 경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왕조의 발상지?이고
하여 6진을 개척하면서 회령, 경흥, 경원까지 완전하게 확보하게 됩니다.
국경 분쟁의 명분이 된 공험진은 여러 설이 있으나
제가 그간 살펴본 바로는 고려 예종조 여진정벌의 실질적인 최전방은 길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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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갈라전은 금사의 호구수나, 고려 문종조 여진정벌 당시의 부족 현황 및 호구수를 살펴보면 대략 2만호 가량입니다.
윤관이 초기에 갈라전으로 진군하면서 풀 베듯이 여진족을 죽이거나 몰아내면서 갈라전의 상당 부분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에 완안부는 부족 연합군을 편성해 반격하지요.
실상 이전까지 완안부가 직속으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1102년 소해리 토벌전에 들어서야 1천이 되었고,
요와의 개전 초기에 찰지수 전투에서 2700명, 출하점에서 1만(새벽 도달한 병력 3700명),
이후 호보답강에서 천조제의 친정군에 대항한 것이 2만이었습니다.
즉, 여진정벌전 당시의 완안부 직속병은 1~3천 정도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것이 고려에 반격하면서 모든 생여진 부족을 끌어들이지요.
초기에 완안부가 파견한 알새가 이끈 연합 부대가 10부대이며, 병력은 최대 2만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1109년 대고려 전쟁 말기에는 6만까지 동원해서 길주를 공격합니다.
당시의 호구수 등을 살펴보면 생여진만의 병력은 2~3만이 한계치고,
나머지 3만은 갈라전의 남녀노소를 모두 포함하여 허재가 길주성에서 파악한 병력 6만으로 생각됩니다.
*소해리 : 요 황실의 외척으로 1102년 반란을 일으켜, 중무장한 병력 2천을 이끌고 여진으로 도주한 인물이다.
요는 완안부에 명하여 연합하여 소해리를 토벌코자 하였는데,
영가가 병력을 모집해 처음으로 완안부가 1천 명을 통솔케 되었다.
요의 수천병이 쉽게 소해리를 진압하지 못하자, 영가는 요의 장수에게 간하여 군을 물리게 하고
완안부 병력만으로 소해리를 잡아 죽여 난을 토벌했다.
송막기문에 의하면, 여진에는 갑옷이 매우 귀하였는데
소해리의 난을 전후하여 갑옷 500벌을 얻게 되어 중무장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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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고려가 9성 반납 전까지 실질적으로 확보한 최북단은 길주였고,
그 이북에 공험진이 있다손 치더라도, 여진에게 빼앗긴 3성 중에 속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일전에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지만은, 갈라수 전투와 같이 고려군이 두만강을 한 번쯤 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즉 공험진이 길주 이북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1109년 5월 초 여진군 6만이 길주를 포위하자,
5월16일 오연총이 구원군을 이끌고 길주로 가다가 공험진에서 대패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1109년 5월 당시 공험진은 길주 이남이거나 북쪽이어도 길주와 매우 가까운 곳에 축성된 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험진은 여진 정벌전에는 고려 내지에 축성 기록이 있는 성이고, 반환 기록도 없는 성일뿐더러,
여진 정벌이 끝난후에도 재축성을 하기도 하는 성이기도 합니다.
하여, 전에 공험진은 시기에 따라 축성 위치가 달라질 수도 있는 성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