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6년 5월 기사中
ㅇ 척준경이 김향과 함께 상위 장군(上衛將軍) 7인과 서리와 종들 20여 명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나오니, 창졸간의 일이기에 아무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어, 각기 목책의 나무를 뽑아서 몽둥이를 만들어 가지고 금오위(金吾衛) 남쪽 다리로부터 대궐로 들어가니, 조의(趙毅)가 맞이하면서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하며 들어가자, 곧 광화문(廣化門)을 닫아버렸다. 이공수(李公壽)가 뒤따라 이르자 왕이 한쪽 문을 열어 그를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공수는 바로 이수(李壽)이다. 이때에 순검 도령(巡檢都令) 정유황(鄭惟晃)이 백여 명을 거느리고 군기감에 들어가 무기와 갑옷을 나눠 주고, 연경궁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소경 유원식(柳元湜)을 만났는데, 그 말이 불순하자 즉시 죽였다.
ㅇ 척준경이 갑옷을 입고 급히 궁궐로 들어가니, 왕은 천복전(天福殿) 문에 나와 척준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척준경이 왕을 모시고 나오는데 이자겸의 무리가 활로 척준경을 쏘았다. 척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한번 호통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왕이 군기감으로 들어가 군사를 시켜서 호위를 엄중히 하고, 척준경이 승선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이자겸을 부르니 이자겸이 소복을 하고 왔다.
척준경이 칼을 한번 빼어 들고, 호통을 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역시 척준경의 무력이 남다르긴 남달랐나 봅니다.^^
한편 "이자겸이 소복을 하고 왔다."는 이점에서 두가지 상황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자겸이 군사를 시켜 인종을 살해하려는 기도를 하는 상황에서, 미리 인종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소복을 입고 나타난 경우이고.
둘째는, 이자겸이 척준경이 인종을 보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체념하고, 소복을 입고 나타난 경우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상황의 경우, 궁궐밖에는 이자겸을 옹호하는 군부세력들과 사병들이 있었는데, 척준경의 일,이백 군사들을 두려워하여 순순히 자신의 목숨을 인종에게 내주는 상황은 언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경우가 유력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자겸이 이미 순덕부의 군사를 대궐 북쪽으로 보낸 상태에서, 궁궐에서 승선이 찾아와 궁궐에 급변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이 성사된줄 알고 소복으로 갑아입고 궁궐에 들어간것으로 보입니다.
1126년 5월 기사中
ㅇ 척준경이 이공수와 상의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그의 장군 강호(康好)와 고진수(高珍守) 등을 베어 죽였는데, 모두 이자겸이 시키는 대로 한 자들이었다. 사람을 나눠 보내어 그 무리를 체포하고 왕이 몸소 광화문에 나와 모여든 여러 사람에게 포고하기를,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 매우 대역이 말할 수 없었는데, 충신들의 의거로 해를 면하게 되었다." 하니, 모든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환호하며 기뻐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ㅇ 이지미(李之美)가 사변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백여 명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다가, 이자덕(李資德)ㆍ김인규(金仁揆)와 함께 병부에 들어갔으나 역시 이자겸이 붙잡힌 줄을 알지 못하였다. 저녁에 순검군이 병부에 나가 이지미를 잡아 검점소(檢點所)에 가두자, 이자덕 등은 놀라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왕이 연경궁으로 돌아올 때에 시종이 먼저 들어가 청궁(淸宮)하는데, 중 의장(義莊)이 내침(內寢)에 숨어 있으므로 잡아서 팔관보(八關寶)로 보냈고, 이자겸과 아내 최씨와 아들 이지윤(李之允)은 영광에, 이지미(李之美)는 합주(陜州 경남 합천)에, 이공의(李公義)는 진도에, 이지언(李之彦)은 거제에, 이지보(李之甫)는 삼척에, 의장은 금주(金州 경남 김해)에, 이지원(李之元)은 함종(咸從 평남 강서)에 귀양보내고, 합문지후 박표(朴彪)ㆍ문중경(文仲經), 직장 박영(朴永), 태사령 양인(梁麟), 동관정(冬官正) 양해(梁獬), 내시 이숙신(李叔晨)ㆍ이분(李芬), 대장군 김호(金好), 장군 지호(池顥)ㆍ지복신(池福臣), 낭장 최사염(崔思琰), 별장 위호(位好), 산원 송용중(宋用中)과 자식 30여 명과 관노ㆍ사노 90여 명은 모두 먼 지방으로 나누어 귀양보내었다.
박표란 자는 가장 간교하고, 자겸에게 아부하여 수탈해 들이고 재물 긁어 모으는 짓을 모두 그가 행하여, 이익을 노리고 벼슬을 얻으려는 사람이 다투어 그에게 뇌물을 바치니, 드디어 큰 부자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더욱 미워하여 중도에서 죽여 물속에 넣어 버리고, 또 신봉문에서 활쏜 자 1명과 이지언의 가신 김충(金冲)을 잡아서 칼을 씌워 사흘 동안이나 도시에서 위엄을 보이고 외딴 섬으로 귀양 보내고, 그 친당인 평장사 이자덕ㆍ김인규(金仁揆)와 동지추밀원사 김의원(金義元), 예빈경 이자원(李資元), 전중소감 박효렴(朴孝廉), 내시낭중 왕의(王毅), 지후 이존(李存)은 모두 수령으로 좌천시켰다.
평장사 박승중(朴昇中)을 울진에, 그 아들 박심조(朴深造) 등 4명은 남쪽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박승중은 허재(許載)ㆍ최식(崔湜)과 함께 이자겸에게 아부하여 못할 짓이 없었다. 심지어 부(府)를 세우고 관원을 설치하며 전(箋) 혹은 절(節)이라고 부르게 한 것이 모두 박승중의 소행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간관이 논박하여 배척하였다.
ㅇ 교서에 선포하기를, “짐이 어린 나이로 조종의 대업을 이어받아 외가에 의뢰하고자 하여,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위임하였는데, 탐학하고 포학한 짓을 함부로 하고 백성을 괴롭혀서 나라에 해가 되었다. 짐이 비록 알았으나, 막아 낼 수가 없던 차에,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나자 판병부사 척준경이 의거를 일으켜 난국을 바로잡았으니 그 공은 잊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해당 관아로 논공하여 상을 내리고, 군기 소감 최사전(崔思全)도 뜻을 같이하여 은밀히 도왔으니 아울러 공을 포상하게 하라." 하였다.
ㅇ 척준경을 문하시중에 임명하니, 척준경이 계품을 뛰어넘었다고 하여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로써 이자겸과 일당들은 전부 숙청을 당하였습니다. 인종은 척준경에게 문하시중을 제수하였지만, 척준경은 사양하였지요.
또한 척준경은 이자겸처럼 도당을 결성하여 정권을 휘어잡을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것으로 미루워, 척준경에게는 역심을 품을 마음도, 권세를 잡고자 하는 마음도 크게 없었다는것을 증명시켜 주지요. 이자겸 같은 권신에 의탁하였다가, 같은 패거리로 몰려 아들과 동생이 죽자, 궁궐을 범하는 죄를 지은 것이지요.
이자겸은 영광군에서 반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1126년 12월 그곳에서 죽습니다.
반년만에 죽었는데 사인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인종은 하교하시길 "외조부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육친의 사랑을 어찌 쉽게 잊으리오" 하며,
이자겸에게 검교 태사(檢校太師) 한양공(漢陽公)으로 추증(追贈),복권시켜 주고, 이자겸의 처(인종의 외할머니) 최씨를 개경에 불려들여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에 봉합니다. 또한 이자겸의 자식들도 죽이지 않고, 유배형에만 처하였지요.
훗날, 사관들은 이런 인종의 어진 마음을 기려, 어질인(仁), 인종이란 묘호를 올리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