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이 벌어지기 1년 전에 목은 이색이 쓴 이자춘 신도비
<아들 성계(成桂)를 낳았다. 지금 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 완산부원군(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 三重大匡 判三司事 兼 判典農寺事 上護軍 完山府院君)이다. >
<판삼사(判三司)인 아들이 있어서 공훈과 명망이 한 세상에 으뜸이며>
이성계는 판삼사에서 1388년 1월 15일 개각에서 수문하시중이 됨
위화도 회군은 1388년 5월 22일 벌어짐.
고려사 1388년 1월 15일 기사中
○ 최영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이색(李穡)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신해년(1371)에 삼사공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제수받던 날에, 내가 사공(司空)으로 있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이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하문하기를
“문신인 색(穡)과 무신인 성계(成桂)가 같은 날에 문하성(門下省)으로 들어왔는데, 조정의 여론은 뭐라고 하던가?”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긍(自矜)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에 비추어 보면 조정의 반열에 공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는다고 하겠지만,
나와 공의 우정이 마치 물처럼 담박하기만 하고, 오래되어도 서로가 공경하는 풍도를 보고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내가 감히 공의 부친을 나의 부친처럼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서 신도비(神道碑)의 명(銘)을 짓게 되었다.>
이성계의 부탁으로 이색이 이자춘의 신도비를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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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
신도비(神道碑)는 『목은문고(牧隱文藁)』권15와 『동문선(東文選)』권119에 실려 있으며, 1387년(우왕 13)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신도비의 주인공인 이자춘(李子春, 1315~1360)은 자 역시 자춘(子春)이며, 전주(全州) 사람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이다. 이자춘의 증조는 안사(安社 : 穆祖), 조부는 행리(行里 : 翼祖), 아버지는 춘(椿 : 度祖)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광(光)의 딸이다.
신도비에 따르면 이자춘은 1355년(공민왕 4)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고려에서 벼슬을 받고 개경에 머물다 1년 만에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 兼 兵馬使)로 다시 함흥으로 돌아갔으나, 4년 만에 병사하였다. 조선 태종 때 환조(桓祖)로 추증되었다.
이자춘은 세 번 장가들었다.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은 성계(成桂)이며, 딸은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는데, 정화택주(貞和宅主)에 봉해져 있다. 측실(側室) 이씨(李氏)의 아들은 원계(元桂)이다. 김씨(金氏)는 정안택주(貞安宅主)로 봉했으며, 아들은 화(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