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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1)

 척준경(拓俊京)은 곡산척씨(谷山拓氏)의 시조로 고려사 반역열전에 그의 출신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척준경(拓俊京)은 곡주인(谷州人 황해도 곡산)이니 그 선조는 본래 주리(州吏 지방 공무원)로 집이 가난하여 능(能)히 학문(學問)하지 못하고 무뢰배(無賴輩)와 함께 놀면서 서리(胥吏 말단관직)되기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더니 숙종(肅宗)이 계림공(鷄林公)이 되니 그 부(府)에 가서 종자(從者)가 되어 드디어 추밀원 별가(樞密院別駕)에 보임(補任)되었다.

 

척준경의 아버지는 척위공(拓謂恭)으로 예종4년(1109년) 척준경의 군공으로 말미암아 예종의 부름을 받고 하사품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척위공의 직위가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라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검교(檢校)는 일종의 명예직을 뜻합니다.

아마 척준경의 아버지는 군의 하급 장교였던 모양이며, 척준경의 군공에 힘입어 명예대장군까지 오른듯 싶군요.

 

하여튼 척준경은 한미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릴적에는 무뢰배랑 어울려 다니며 힘깨나 쓴듯 합니다. 그러던 것이 숙종이 즉위전 계림공(鷄林公)에 봉작되어 있을때 그의 사저에 출입하면서 숙종과 가까워진듯 합니다. 마치 수호지의 고구를 연상케 하는군요.

 

드디어 숙종이 즉위하자 척준경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에 임명됩니다. 추밀원은 왕명을 출납하던 기관으로 요즘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쯤 됩니다. 별가(別駕)는 정식관직은 아니고 관리가 부리던 사람을 말합니다. 여하튼 숙종과의 인연으로 대통령 비서실에서 관직(?)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척준경이 숙종의 배려로 급속히 승진을 한것도 아닙니다. 척준경이 정식으로 관직을 수여받은 때는 숙종 즉위후 9년째인 1104년 입니다.

 

당시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동북아를 호령하던 거란이 점차로 쇠퇴하고, 여진족이 급속하게 세력규합에 나서게 됩니다.

여진족은 고구려 당시에는 고구려를 구성하는 민족이었으며, 일부 동북부의 유목민을 말갈족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 패망후에는 발해의 주축세력이 되어, 역시 동북아를 호령합니다. 그러던것이 발해가 북방의 거란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발해 북부의 부족은 거란에 흡수되고, 남부의 부족들은 여진족으로 불리우며 거란 및 고려에 조공을 바칩니다.

여진족은 가을추수후에는 고려에 조공을 하며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봄 식량이 떨어지면 고려 변경을 침공해 식량을 약탈해간후, 다시 가을 추수가 끝나면 조공을 바치는 행위를 계속해, 고려 조정의 심기를 건드리게 됩니다. 게다가 여진족이 급속히 부족통합을 이뤄가면서 침략행위도 더 극성을 부리고, 규모 또한 커지게 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 정벌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숙종9년(1104년) 1월 동여진에서 오라수(烏羅首)와 부내로(夫乃老)의 세력다툼이 벌어졌는데, 이때 고려와 친하던 부내로(夫乃老) 세력이 패하자, 부내로는 군사 1753명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와 고려조정에 투신합니다. 오라수는 장수 공형(公兄) 지조(之助)에게 강한 기병을 주어 부내로를 추격했는데, 고려 정주(定州)의 관문 밖에까지 와서 주둔하여 부내로를 내놓으라고 으름짱을 놓습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삼아 이를 진압하라 명을 내립니다. 이때 9년간을 추밀원에서 놀고먹던 척준경도 임간을 따라 출전하게 됩니다. 2월에 임간이 공을 세우려 조련되지도 않은 병사를 이끌고 무리하게 싸움을 걸어보지만, 고려군은 대패하여 군사 태반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주성이 함락직전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홀연히 척준경이 임간에게 병기(兵器)와 개마(介馬 무장한 말)를 달라고 청합니다. 이때 병기라 하면 창이나 극을 말하며, 활과 화살을 포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