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국성이 조선 회령내에 있었다는 기록은 예상은 했지만 아마 잘못된듯 합니다.
지도 출처 : 1402년 조선 태종 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제작자 : 조선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와 이회(李薈)
지도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영조 임금님 어쩌실 거예요 ㅠ.ㅠ
조선왕조실록 영조 1727년 11월8일 기사中
검토관 조진희가 북관 여러 고을의 군비가 허술함을 아뢰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진희(趙鎭禧)가 북관(北關)의 여러 고을에 군비(軍備)가 허술함을 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회령(會寧)은 성중(城中)에 우물이 없어 주민(住民)들이 모두 성 밖에 나가서 물을 길어가니,
위급한 때에 믿을 만한 곳이 되지 못합니다.
들은즉 ‘본부(本府)의 수십 리 밖에 운두성(雲頭城)이 있는데 천연(天然)의 험준(險峻)함이 매우 장대(壯大)하고
성중에 또 우물이 있으며 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해 이르기를
완안성(完顔城)이라 하고 혹은 오국성(五國城)이라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제 만약 이 성을 수리하여 회령부(會寧府)를 옮기거나 혹은 보라 첨사(甫羅僉使)로 하여금 살게 한다면,
부령(富寧)으로 더불어 무산령(茂山嶺)을 협수(夾守)하여 족히 내외 관방(內外關防)의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형편을 살피고
다시 상확(商確)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한 다음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국조보감 영조 1741년 기사中
5월.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오국성(五國城)에 황제총(皇帝塚)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과연 고실(故實)에 밝은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고려(高麗)에 길을 빌리려 하였다면 오국성이 북도에 있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이미 황제의 무덤이라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꼴베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