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영조 1750년 2월3일 기사中
송나라 승상 문천상(文天祥)의 화상을 사당을 세우고 배향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사은 정사(謝恩正使) 조현명(趙顯命)이 문천상의 화상을 연경에서 구하여 임금에게 바치니, 하교하기를,
“문 승상의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일찍이 들으니, 육진(六鎭)에는 황제총(皇帝塚)과 오국성(五國城)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문천상과 육수부(陸秀夫) 두 사람을 사당을 세워 배향하여 이제(二帝)로 하여금
신하가 없는 중에 신하가 있게 하고자 한다.”
하고, 이어서 예관(禮官)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해동역사를 쓰인 한치윤 선생 안습 ㅠ.ㅠ
해동역사지리고(海東繹史地理考) 中
그렇다면 휘종과 흠종의 능은 모두 우리나라의 회령에 있는 것인바, 회령이 오국성임은 분명하다.
또 살펴보건대, 매가 함흥 북쪽 지역에서 산출되므로 요나라의 매를 포획하는 자들이 매번 요동에서 백두산을 넘어 온다.
《문헌통고》에서 이른 바 “장백산을 넘어가서 그물로 잡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금사》 세기를 근거로 해서 보면, 당시에 응로(鷹路)를 막은 자는 분명히 삼수, 종성 등지의 사람들이다.
오국이 만약 영고탑의 동북쪽에 있다면, 요나라 사신은 백두산을 넘을 수가 없으며, 삼수 등의 사람들이 길을 막을 수가 없다.
오국성이 지금의 회령부임은 다시 무엇을 더 의심하겠는가.
아~ 다산 선생 ㅠ.ㅠ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中
경흥(慶興)에 있는 송제(宋帝) 때 만들었다는 화로[爐]에 대한 변증
금년 봄에 북방(北方)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경흥부(慶興府)에서 땅을 파다가 화로 하나를 얻었는데, 그 낙관[款識]의 각자(刻字)를 상고해 보니,
‘소성 2년에 주조하였다.[紹聖二年鑄]’ 한 5자가 있었다.
그 자체(字體)는 결손(缺損)된 것이 없었고 한쪽 다리만이 절뚝발이었다. 그런데 화로는 불을 담아 놓으면 꺼지지 않고,
방안에 놓아두면 깊은 겨울에도 따뜻한 봄과 같았으며, 음식(飮食)을 데우면 순식간에 데워지는 아주 보배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부사(府使)가 그 절뚝발을 언짢게 여겨 공장이를 시켜서 보충하게 하였던 바, 이 때부터는 화로가 영험(靈驗)이 없었다.
그러므로 보충한 것을 다시 제거하였으나 그대로 영험이 없었다. 이에 경흥부 사람들이 성대하게 서로 말을 전하기를,
‘고기(古器)가 다시 나왔으니 송(宋) 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실지(實地) 무덤은 이곳에 있다.’고 한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아, 이것은 사설(邪說)이다. 《우초지(虞初志 명(明) 나라 탕 현조(湯顯祖)가 저술한 서명(書名))에
‘고려인(高麗人)이 철조(鐵條)를 사는 자가 있어, 이것은 신우(神禹)가 홍수(洪水)를 다스렸던 대(帶)이다고 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화로 입이 좁아서 거기에 담은 불이 약간 오래 지탱했을 뿐이지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황제총(皇帝冢)은 회령부(會寧府) 운두보(雲頭堡)에 있다고 전해지며, 지금까지도 대롱(大瓏)이 있다 하는데,
경흥에 어찌 그 무덤이 있겠는가.
금(金) 나라 사람이 처음 일어날 때에 그들의 경조(景祖)ㆍ목조(穆祖) 등이 장백산(長白山) 동쪽에 살면서 해마다
오국성(五國城)과 해주(海州)ㆍ청주(靑州)의 길을 다투었는데,
이른바 포섭부(蒲聶部)와 몰연부(沒撚部)가 모두 장백산의 동쪽에 있다.
또 야나(耶懶)ㆍ휼품(恤品)ㆍ성현(星顯)ㆍ통문(統門)은 모두 우리나라 관북(關北 함경도 지방)의 땅으로서
오국성과 서로 이웃해 있는 것으로 보아 오국성이 회령부(會寧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휘종과 흠종이 사로잡혔을 때 처음은 금(金) 나라 동경(東京)에서 골리개로(鶻里改路)로 옮겨졌다가,
또 오국성으로 옮겨졌으며, 그들이 붕(崩)하게 되어서는 모두 중국(中國)에 반장(返葬)되었다.
그러니 이 화로는 대개 파천(播遷)될 때에 유락(遺落)되었던 것이지 어찌 명기(明器)로 순장(殉葬)된 것이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낙관[款識]이 이러한데 어찌하겠는가.”
하기에, 나는,
“금(金) 나라 사람이 송(宋) 나라의 공사(公私)의 모든 기물(器物)을 약탈한 것이 매우 많은데,
낙관에 송 나라 연호(年號)가 기록된 것을 어찌 의심하는가.
그리고 낙관에 송 나라 연호를 기록한 것은 반드시 송 나라 황제만이 사용하였고,
신민(臣民)들은 감히 사용하지 못했겠는가.”하였다.
요약 : 경흥에 송나라 돈이 떨어진것은 이곳에 휘종의 릉이 있는게 아니라 끌려가다가 돈을 떨어뜨린 것이다.
휘종의 능은 회령에 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