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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라고?? (2)

 목은 이색이 위화도 회군 1년 전에 이성계의 부탁으로 쓴 이성계 부친 이자춘의 신도비


위화도 회군 전 이성계 가문내역이 쓰인 신도비


이 신도비에는 이성계 집안 내력과 

이안사와 충렬왕의 일화, 이춘과 충숙왕의 일화, 이자춘과 공민왕의 일화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의 이름이 안사, 춘, 자춘, 성계 그리고 이성계의 당시 아들 방언도 포함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목은 이색이 어떤 인물인지, 조선이 개국하고 개국공신들이 이색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실록 등을 참고하시고요.


위화도 회군 후 서슬 퍼런 이성계 치하 고려 조정에서도 이색은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이색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태조를 사저에서 만나다

11월, 이색(李穡)이 왕의 부름을 받고 폄소(貶所)로부터 서울로 돌아와서 태조를 사제(私第)에서 뵈오니, 

태조는 몹시 기뻐하여 그를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앉아 술을 올리면서

이색에게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이색이 모두 사양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그르게 여겼다. 

매우 즐기고서 파(罷)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객지를 떠돌아다니다 결국 절에서 죽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393년 1월 21일

이색(李穡)이 와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謝禮)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395년 11월 7일

도평의사사에서 한산군 이색에게 쌀과 콩을 보냈으나 받지 않다

도평의사사에서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에게 미두(米豆) 1백 석을 보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395년 11월 24일

한산군 이색이 오대산(五臺山)에서 돌아왔다. 당초에 색(穡)이 외방으로 버림을 받았다가 종편(從便)하라는 은총을 입어 

관동 지방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에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부르니, 색이 왔다. 

임금이 친구의 예로 접대하고 조용하게 담화를 하고 술을 마시고 즐겼다. 나갈 때에는 중문까지 나가서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1396년 5월 7일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에서 거주하려 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와서 한산백(韓山伯)을 봉했다. 색이 진현(進見)하고 하는 말이,

“개국하던 날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만일 알렸다면 읍양(揖讓)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마고(馬賈)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킨 것이었다. 남은(南誾)이 옆에 있다가 하는 말이,

어찌 그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

하니, 임금이 은(誾)을 꾸짖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뒤에 이것을 논의하는 자가 있으므로, 남재(南在)가 색의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불러서 하는 말이,

존공(尊公)이 광언(狂言)을 하여 이를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