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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땅따먹기(2)

 조선초에 이 공험진이 다시 대두된 것은 분명히 명과의 국경분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서쪽 국경은 고려조부터 유지해오던 압록강 라인이 어느 정도 확정된 상태였고,
문제는 동북 국경이었지요. 당시 동북은 확실히 내 땅이라고 할만한 나라가 없는 무주공산?이었지요.
물론 여진족이 땅을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나라를 이루진 못하였고,
고려조 이성계가 함흥을 중심으로 동북면을 관장하면서 많은 여진족이 내투하였으며,
조선이 건국해서도 기미정책을 쓰면서 간접 지배를 하였지요.

국경분쟁 당시 때마침 회령의 맹가첩목아가 명의 회유를 거부하고 조선에 내투하였지요.
게다가 경흥은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땅이었습니다.
즉, 조선 입장에서는 국경을 두만강 라인과 경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원군이 공험진이어야만 했습니다.

*경원(慶源)의 뜻 자체가 기쁨의 근원, 즉 조선왕조 선조의 근원이란 뜻으로 명칭 된 것이며, 
  경흥(慶興)은 기쁨이 흥한 곳, 즉 조선왕조의 선조들이 흥한 곳이란 뜻으로 명칭 된 것이고,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와 고조모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원래 있던 곳입니다.
  즉 세종에게는 매우~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점이지요!!!


고려가 갈라전을 일시 점유한 기간은 1107년 12월14일 갈라전 진입부터 1109년 7월 철수까지 길어야 2년 반입니다.
고려가 경계비를 세웠다는 공험진도 점유기간이 1108년 2월 27일에서 길어야 1109년 5월까지 2년 3개월 남짓입니다.

하지만 국초 국경분쟁에 있어 조선에게 중요한 것은 명분이었습니다.
명분상 명나라가 원나라 땅 모두 내놔라 하면, 조선은 동북면을 통째로 내줘야 하겠지요.
하지만 명나라가 여진족 땅을 모두 직할령으로 반드시 지배하겠다는 의지는
이후를 살펴보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해서 조선이 동북쪽 국경 라인의 가이드 라인을 두만강 라인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3백 년전 고려가 일시 점유했던 공험진을 최동북단 경원으로 설정해야, 
이후에 명과 마찰 없이 개척을 통해 두만강 라인을 확보하고 국경으로 확정지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해서 조선에서는 명에 표문을 올려, 회령의 건주도독 맹가첩목아가 20년 전부터 조선에 귀부하였으며
공험진의 경원은 고려조에 이미 국경으로 확정지었다며 
이남의 땅은 여진족 인민을 포함해서 조선의 것으로 해달라고 청하게 되지요.
여러 차례 표문과 실태를 조사하는 사신이 오간 후에 
결국 명은 동북쪽 국경라인을 공험진 이남과 회령 이남, 즉 두만강 라인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만 공험진 이북은 모두 요동에 환속한다는 전제를 달았지요.

이는 결국 세종조의 6진 개척의 명분이 되었고, 회령~경원~경흥에 모두 진을 설치해, 완벽하게 조선 영토로 굳히게 되지요.
허나 경원이 공험진인것인가는 세종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관리를 파견해 증거를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단지 증거라는 게 오래 전부터 내려온 풍문이 있었다, 경원의 거양성(巨陽城)이 윤관이 쌓은 성이라는 풍문,
거양성 서쪽 60리의 선춘현(先春峴)에 고려지경이라는 비석이 나왔다<진짜???> 정도였습니다.
<언제부터 두만강 이북 700리 선춘령 공험진 외방소 이야기가 나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 할듯싶네요.
  세종은 윤관의 고려 경계비가 있었다는 선춘점을 찾으라 명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원 안에 공험진, 거양성, 선춘현 비가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두만강 이북 700리 선춘령 공험진 외방소가 나왔는지 의문이 드네요^^;>
결국 세종은 경원 소하강(蘇下江) 근처를 공험진으로 확정짓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439년 8월6일 기사中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전지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이 장백산(長白山) 북록(北麓)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江外]에 옛 성(城)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古城)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女眞)을 쫓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궁금증이 많으신 대왕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