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 증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 이공신도비명 병서(高麗國 贈 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判典理司事 完山府院君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 榮祿大夫 判將作監事 李公神道碑銘 幷序)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다. 사도는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다.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다.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았다.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집주(內侍執奏) 인(隣)을 낳았다.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다. 장군 양무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다.
안사는 성품이 호방하여 천하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의주(宜州)의 수령으로 어진 정치를 펼쳤다. 인척 때문에 강릉부(江陵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살았다. 대개 그 곳의 풍속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으로 이곳 현령의 뜻을 거슬리자, 현령이 해(害)치려는 사실을 어떤 사람이 공(公)에게 알렸다. 공은 가족을 이끌고 몽고씨(蒙古氏)에게 달아났다. 몽고씨가 그를 남경(南京)에 살게 하고, 5천 호소(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삼았다.
다루가치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千戶) 행리(行里)를 낳고, 그의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원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자 천하의 병선(兵船)들이 우리나라에 모여들었다. 충렬왕(忠烈王)은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군함(軍艦)을 만들게 하고, 명장을 뽑아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남경천호(南京千戶)도 또한 원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왔다. 충렬왕을 만나보는 일이 두세 번 거듭될수록 공은 더욱 공경하고 더욱 삼가하였다. 매양 왕에게 사죄하여 말하기를, “전하의 신하인 저의 선조가 북쪽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이의 입을 벗어나려고 하였을 뿐이며, 감히 군부(君父)를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왕은 “경(卿)은 본래 사족(仕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어버리겠는가. 이제 경의 하는 일을 보니 마음에 있는 바를 넉넉히 알 수 있다” 하였다.
천호(千戶)가 등주호장(登州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에게 장가들어 찬성사(贊成事)로 추증된 춘(椿)을 낳았다. 춘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에 왔다. 충숙왕은 상품을 더욱 넉넉하게 주어, 그의 충성을 권장하였다. 찬성사(贊成事 : 椿)는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추증된 박광(朴光)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공에게 아버지이며, 어머니이다.
공의 이름은 자춘(子春)이며, 자(字)도 자춘이다. 이(齒)를 갈만한 나이에 범상한 아이들과는 다른 바가 있었다. 차츰 자라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아버지의 벼슬을 계승하자 사졸(士卒)들이 즐겨 따랐다. 지정(至正) 을미년(공민왕 4, 1355) 선왕(先王)을 뵈었더니, 선왕은 “그대의 조부와 아버지가 몸은 비록 외국에 있었으나, 마음은 우리 고려의 왕실에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실로 총애하고 칭찬하셨다. 이제 그대가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욕되게 함이 없으니, 내 장차 너를 옥(玉)같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하였다.
쌍성(雙城)은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관리의 다스림이 소략하나 땅이 비옥하여 인구가 많아지자 우리 나라의 동쪽과 남쪽에 살던 항산(恒産)이 없는 백성들이 많이 옮겨 갔다. 국가가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알리자, 황제의 명령을 받아 파견된 관리가 왔으며 요양성(遼陽省)에서도 또한 관리가 왔다. 선왕은 성낭중(省郎中) 이수산(李壽山)을 보내 새 호적(戶籍)의 백성과 옛 호적의 백성을 가려 구분하게 하였다. 이를 삼성조감호계(三省照堪戶計 : 세 성(省)이 호적의 수를 대조하여 감정(勘定)함)라 하였다. 그 뒤에 위무(慰撫)하고 안정시키는 일이 마땅한 바를 잃어 백성들이 점차 떠나자, 공에게 이곳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여러 대에 걸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포상한 것이다. 백성들은 이때부터 각자의 생업에 안정함을 얻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봄 공이 내조(來朝)하자, 선왕은 맞아들여 말하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위무하고 안정하게 하는데 수고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그 때 기씨(奇氏)의 모란(謀亂)을 밀고하는 자가 있었는데, 쌍성의 관리가 이에 관련되었다고 하였다. 선왕은 공에게 “경(卿)은 진(鎭)으로 돌아가라. 우리 백성 중에 만일 변란이 있거든 마땅히 나의 명령과 같이 하라” 하였다. 5월에 기씨를 평정하였다. 재상 유인우(柳仁雨)에게 쌍성으로 가서 잔당을 토벌하고 또 평민에게 두려워하지 말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유인우가 접경에 이르러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못하였다. 임금은 공에게 소부윤(小府尹)과 중현대부(中顯大夫)의 관계(官階)를 내리면서,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시켜 내응(內應)하라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공은 명령을 듣고 즉각 행군하여 유인우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소생도경(小生都景)을 쫓았다. 소생도경이 처자를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이에 임금은 “쫓아야 할 자는 갔다. 죽이거나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음식물을 갖고 와서 군사를 환영하였다. 주현(州縣)의 이름도 모조리 그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고주(高州) 요덕(耀德) 장평(長平) 원흥(元興) 정주(定州) 함주(咸州)가 바로 그것이다.
9월 공의 관계(官階)를 대중대부(大中大夫)로 하고 사복경(司僕卿)에 임명하고, 개경(開京)에 집을 하사하여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듬해 가을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에 승진되고, 통의(通議) 정순(正順)의 두 대부가 더해졌다. 이 해에 이색(李穡)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뜰 안에 있다가 공의 얼굴을 보니, 낯은 주홍 빛깔이고 수염은 아름다웠다. 감히 지위의 순서를 뛰어 넘어 서로 더불어 대화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풍채는 지금도 오히려 나의 마음과 눈에 남아 있어 잊을 수가 없다.
경자년(공민왕 9, 1360) 봄 3월 영록대부 판장작감사(榮祿大夫 判將作監事)로서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었다. 4월 갑술일 병으로 별세하였다. 나이 46세였다. 아깝다. 부음(訃音)을 듣고 현릉(玄陵 : 공민왕)은 매우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을 하고 예(禮)에 따라 부의를 보냈다. 사대부들은 모두 놀라 “동북 방면에 사람이 없어졌구나” 하였다. 그 해 8월 병신일 함주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세 번 장가들었다. 이씨(李氏)의 아들은 원계(元桂)이며, 지금 추충절의보리공신 중대광 완산군(推充節義輔理功臣 重大匡 完山君)이다.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는데, 문하시중 영흥부원군(門下侍中 永興府院君)으로 추증된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 성계(成桂)를 낳았다. 지금 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 완산부원군(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 三重大匡 判三司事 兼 判典農寺事 上護軍 完山府院君)이다. 딸은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 삼중대광 용원부원군(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 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정화택주(貞和宅主)에 봉해져 있다. 김씨(金氏)는 정안택주(貞安宅主)로 봉해졌으며, 아들 화(和)는 지금 성근보조공신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상호군(誠勤輔祚功臣 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 上護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