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고려군의 두만강 도하 가능성 (2)

 지도출처 : 중국역사지도집 금대 지도中






본시 금의 총관은 5경과 14총관부를 두었습니다. 
이중 금사지리지에 한번이라도 총관부나 병마총관부를 설치한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會寧府 戶三萬一千二百七十
合懶路
咸平府 戶五萬六千四百四
遼陽府 戶四萬六百四
婆速府路
臨潢府 戶六萬七千九百七
大同府 戶九萬八千四百四十四
豐州 戶二萬二千六百八十三
開封府 ,戶二十三萬五千八百九十
河北東路
河間府 戶三萬一千六百九十一
真定府 戶一十三萬七千一百三十七
益都府 戶一十一萬八千七百一十八
東平府 戶一十萬八千四十六
大名府 戶三十萬八千五百一十一
河東北路
太原府 戶一十六萬五千八百六十二
平陽府 戶一十三萬六千九百三十六
絳州 戶一十三萬一千五百一十
京兆府 戶九萬八千一百七十七
鳳翔府 戶六萬三千三百三
延安府 戶八萬中九百九十四
慶陽府 戶四萬六千一百七十一。
臨洮府 戶一萬九升七百二十一



2. 사묘아리가 고려군을 험처로 끌어들여 고려군을 유인한후

    고려군이 회군하자 갈라수까지 추급하여 격파함


금사 사묘아리 열전中
高麗築九城於曷懶甸,渾坦攻之,遇敵於木里門甸,力戰久之,阿里挺槍馳刺其將於陣中,敵遂潰。
渾坦與石適歡合兵于徒門水,阿里首敗敵兵,取其二城。
고려(高麗)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城)을 축성(築城)하자, 혼탄(渾坦)이 공격(攻擊)하였는데,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적(敵)과 만나, 오랫동안 역전(力戰/힘껏 싸움)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정창(挺槍/창을 겨누어 듦)하여 (고려의) 진중(陣中)에서 그 장수를 치자(馳刺/질주하여 찌름)하자, 
적(敵)이 드디어 궤멸(潰滅)하였다.
혼탄(渾坦)과 더불어 석적환(石適歡)이 도문수(徒門水)에서 합병(合兵/병을 합침)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주장(主將)이 되어 적병(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하였다.

高麗入寇,以我兵屯守要害,不得進,乃還。
阿里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阿里乘之,殺略幾盡,遂合兵于石適歡。
道遇敵兵五萬,擊走之。
又與石適歡遇敵七萬,阿里先登,奮擊大敗之。
石適歡曰:
「汝一日之間,三破重敵,功豈可忘。」
乃厚賜之。
고려(高麗)가 입구(入寇/적이 쳐들어옴)하자, 
아병(我兵/아군)으로써 요해(要害/요새, 방어가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에 둔수(屯守/주둔하여 수비함)하니, 
(고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곧 돌아갔다.
사묘아리(斜卯阿里) 갈라수(曷懶水)까지 추급(追及/뒤쫓아 따라붙음)하였는데,
고려인(高麗人)이 빙상(冰上/얼음 위)을 쟁주((爭走/다투어 도주함)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 승지(乘之/기세를 탐)하여, (고려군을)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하여 기진(幾盡/거의 없어짐)케 하고는,
드디어 석적환(石適歡)과 합병(合兵)하였다.
길에서 적병(敵兵) 5만(萬)과 조우(遭遇)하여(사묘아리가) 격주(擊走/공격하여 나아감)하였다.
또 석적환(石適歡)과 함께 적(敵) 7만(萬)을 조우(遭遇)하자,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선등(先登/선봉으로 공격함)하여, 
분격(奮擊/분발하여 공격함)하여 (고려군을) 크게 깨트렸다.
석적환(石適歡)이 말하길
「네가 하루 동안에 중적(重敵/강한 적)을 세 번 격파(擊破)하였으니, 공(功)을 어찌 가(可)히 잊겠는가.」
이에 후사(厚賜/후하게 하사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