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기를 갖추고 중무장한 말을 타고 단독으로 성밖으로 나선 척준경은 성을 포위하고 있던 동여진의 기병 대군 사이로 돌진하게 됩니다. 고려사의 기록엔 이때의 상황을 <적진(賊陣)에 들어가 그 장(將) 1인을 베고 포로 2인을 빼앗았다.>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삼국지 진수삼국지의 장료의 행적과 배송지주의 조운별전의 조운의 행적과 비슷하고, 다음에 맹장열전을 설명해드릴, 이의민, 이성계와 비슷한 용력을 보여주는군요.^^ 대군을 헤집는 능력이 있어야 맹장이라 불리울수 있나봅니다. ^_^
이의민의 기록처럼 수천의 창날을 헤치고 들어가 적장을 베었다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사납기로 소문난 여진 기병의 무리를 단독으로 헤집고 들어가 장수중 하나의 목을 베고 포로 둘을 구해왔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여하튼 척준경의 놀라운 무공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일단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죠.
1104년 2월기사
오직 척준경(拓俊京)이 병기(兵器)와 개마(介馬 무장한 말)를 임간에게 청하여 적진(賊陣)에 들어가 그 장(將) 1인을 베고 포로 2인(준민,덕린)을 빼앗고 드디어 교위(校尉) 준민(俊旻) 덕린(德麟)과 함께 각각 1인씩 쏘아 죽이니 적(賊)이 조금 퇴각하였다. 척준경(拓俊京)이 물러나려 하니 적(賊)은 백여 명의 기병으로 추격하였다. 척준경이 화살을 날려 적장1인을 사살하고, 성에서 대상(大相) 인점(仁占)이 적장 1인을 사살하니 적(賊)이 감히 나오지 못하여 아군(我軍)이 입성(入城)할 수 있었다. 그 공으로 척준경을 천우위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로 삼았다. 유사(有司)가 임간 및 병마사좌복야(兵馬使左僕射) 황유현(黃兪顯), 부사대장군(副使大將軍) 송충(宋忠), 호부시랑 왕공윤(王公胤), 우승선(右承宣) 조규(趙珪) 등의 패전의 죄를 아뢰어 탄핵해 모두 파면시켰다.
드디어 무공을 바탕으로 천우위 녹사라는 정8품의 정식관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천우위는 6위의 하나로 병력은 2천이며, 왕의 의장부대였습니다. 당시 고려 군장교의 계급을 살펴보면 상장군>대장군>장군>중랑장>낭장>별장>산원>교위>대정 순입니다. 녹사는 별장과 산원의 중간쯤 되는 계급으로 정식무관은 아니고 문관직입니다. 오늘날의 계급으로 따지면, 소령과 대위 사이의 정식군인은 아니고, 군에 배속된 행정관료쯤 됩니다. 참군사(參軍事)라는 것도 휘하에 병력이 주어지지 않는 임시군직명입니다. 척준경은 출신이 무관이 아니라 숙종의 잠저시절 같이 놀다가, 대통령비서실에서 숙종의 격구,사냥등을 쫒아다니며 얼덜결에 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운격이니 정식 군인은 되질 못했죠. 여하튼 동여진과의 전투에서 패한 고려는 상당히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때 출전했던 장성급들은 전부 파면되었으며, 여진족과의 전쟁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예종(睿宗) 2년(1107년)에 드디어 고려조정은 17만 대군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길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의 고려군의 진용은 윤관 휘하 본군 53000명, 중군 김한충(金漢忠)휘하 36700명, 좌군 문관휘하 33900명, 우군 김덕진휘하 43800명, 해군 2600명 총 17만의 대군이었는데, 척준경은 윤관휘하의 본군에 소속되었습니다.
이때 당시 신기군에 관한 정보는 전에 쓴글 http://cafe.naver.com/goryeosa/204 을 참고하셔도 좋을듯 합니다.
여진과의 첫 조우는 1107년 12월에 이루어졌습니다.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윤관ㆍ오연총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보냈다. 을유일에 윤관ㆍ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고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호왈 20만이라 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ㆍ황군상(黃君裳)을 정(定 함남 정평(定平))ㆍ장(長 함남 정평(定平)) 2주에 나눠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 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백여 명이 이르니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그 가운데 용감하고 약삭 빠른 자 50, 60명이 의심을 품고 관문에 이르러 들어오려 하지 않으므로 병마판관 김부필(金富弼), 녹사(錄事) 척준경을 시켜 길을 나누어 복병하게 하고, 최홍정을 시켜 매우 날랜 기병으로 이에 호응하게 하여 거의 다 사로잡고 죽였다.
12월 병신일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러 여진이 모여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통역 대언(戴彦)을 보내어 항복하도록 권하였더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일전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항복을 말하느냐." 하고 드디어 석성으로 들어가 항거하여 싸우는데, 화살과 돌이 빗발 같아서 군사가 나아갈 수 없었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해는 기울고 사태는 급하니, 너는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이 성을 공격하라." 하니, 척준경이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에 종사(從事)로 있을 때에 죄를 범했는데, 공이 나를 장사라고 여겨 조정에 청해서 용서받게 하였으니, 오늘이야말로 준경이 목숨을 버려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하고, 드디어 석성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입고 방패를 가지고서 적중에 돌입하여 추장 두서너 명을 쳐 죽이자, 이에 윤관의 휘하 군사는 좌군과 더불어 공격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척준경에게 능라(綾羅) 30필을 상주었다.
위의 기사를 미루어 볼때 척준경은 의리를 상당히 중요시하는 인물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척준경은 용맹을 떨쳤는데 항상 단독으로 적진으로 돌진하는 것이 취미인듯 하네요.^^
여하튼 12월 병신일 전투에서 본군,중군,좌군,우군은 여진 각지에서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고 적의 수급을 만개이상 얻는 대승을 거둡니다. 이 전투이후 동여진의 요을내(褭乙乃)등은 3230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