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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점령한 3성은 어디? (1)

 6. 여진에게 함락당한 3성은 과연 어디인가?


금사 사묘아리 열전中
渾坦與石適歡合兵于徒門水,阿里首敗敵兵,取其二城。
혼탄(渾坦)과 더불어 석적환(石適歡)이 도문수(徒門水)에서 합병(合兵/병을 합침)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주장(主將)이 되어 적병(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하였다.

→ 금사에는 고려 2성을 함락하였다고 나옵니다.
    이후 사묘아리가 추가로 1개성을 더 함락시킵니다.

금사 사묘아리 열전中
斡塞、烏睹本攻駝吉城,阿里鑿墉爲門,日已暮,不可入,以兵守之,旦日遂取其城。
烏睹本以被甲並乘馬賜之。
알새(斡塞)와 오도본(烏睹本)이 타길성(駝吉城)을 공격(攻擊)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착용(鑿墉/벽을 뚫음)하여 문(門)으로 하니, 날이 이미 저물어, 들어갈 수가 없자,
병(兵)으로써 지키게 하고는, (다음날) 새벽녘에 드디어 그 성(城)을 취(取)하였다.
오도본(烏睹本)이 피갑(被甲/갑옷을 입힘)하고 겸하여 탈수 있는 말을 하사(下賜)하였다.


송사전 금열전에도 나옵니다.

송사전 금열전
○ 금 강종(金康宗) 4년 병술 예종 원년 고려가 흑환방석(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왕위를 승습한 것을 축하하였다. 강종이 배노(盃魯)를 보내어 빙문하게 하고, 또 전에 약속한 대로 망명한 백성들을 돌려보내 주기를 요구하게 하였는데, 고려가 허락하면서 말하기를,
“사신을 파견해서 국경까지 와서 데려가라.”
하였다. 강종이 이 말을 믿고 완안부(完顔部)의 아괄(阿聒)과 오림답부(烏林答部)의 승곤(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서 이를 데려오게 하고, 강종은 마기령(馬紀嶺)의 을척촌(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인도해 오기를 기다렸다. 아괄과 승곤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이들을 살해하고는 갈라전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9성(城)을 쌓았다. 강종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장차 우리를 탓하여 공격해 올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태조(太祖)만이 혼자 아뢰기를,
“지금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갈라전 지역만 잃겠습니까. 여러 부(部)가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강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알새(斡賽)로 하여금 내외의 군병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 아도한(阿徒罕)을 선봉으로 삼았다. 고려의 군사 가운데 해도(海島)에 주둔한 자들이 있었는데, 아도한이 군사 30명을 거느리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가 영책(營柵)과 전함을 불태우고 이들을 격파하니, 드디어 타길성(駝吉城)이 함락되었다.


한치윤 선생은 해동역사에서 타길성을 길주성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잘 못된 것으로 길주성은 여진과 강화협상이 벌어지던 최후의 순간까지도 
성을 고수하였던 최전방이었지요. 

해동역사 동계편 中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타길성은, 《금사》에 의거하면 분명히 9성 가운데 하나이다. 길주를 옛날에는 길성(吉城)이라고 칭하였는바, 이곳이 바로 타길성이다. 타로(陀魯)는 바로 아로(亞魯)의 음이 변한 것이며, 이 역시 9성 가운데 한 성의 이름인데, 이는 금나라의 국어(國語)가 같지 않은 탓에 칭호가 다르게 표기된 것이다. 목리전(木里甸)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 수가 없으나, 《고려사》에 의거해 보면, 9성의 전역(戰役)에서는 매번 여진과 더불어 함주와 길주 사이에서 싸웠다. 그런즉 목리전의 위치가 함주나 길주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금사에서는 고려의 3개성을 함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고려의 기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지요.
그렇다면 다시 당시 축성되었던 동북 12성에 대해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함주성(咸州城) : 군정 1948호 + 백성 13000호
- 영주성(英州城) : 군정 1238호 + 백성 10000호, 성곽규모 950간(둘레 1.73km), 위치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
웅주성(雄州城) : 군정 1436호 + 백성 10000호, 성곽규모 992간(둘레 1.80km), 위치 화곶산(火串山) 아래
복주성(福州城) : 군정  632호 + 백성   7000호, 성곽규모 774간(둘레 1.41km), 위치 여진 오림금촌(吳林金村)
길주성(吉州城) : 군정  680호 + 백성   7000호, 성곽규모 670간(둘레 1.22km), 위치 여진 궁한촌(弓漢村)
의주성(宜州城) : 군정          + 백성   7000호, 위치 함경남도 덕원
공험진(公險鎭) : 군정  532호 + 백성   5000호
통태진(通泰鎭) : 군정          + 백성   5000호
평융진(平戎鎭) : 군정          + 백성   5000호
숭녕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
선화진(宣化鎭)

*고려사 지리지에는 영주성의 규모를 990간이라 하였으나, 고려사절요와 고려사 병지의 기록에는 950간이라 되어 있음


초기에 건설한 9성 : 큰 글씨의 함주~평융진까지
추후에 건설한 3성 : 숭녕진~선화진
돌려준 성 : 파란색 9성
폐성한 성 : 길주성 제외한 파란색 8성
돌려준 기록이 없는 성 : 빨간색 3성
고려 내지에 건설된 성 : 의주성
고려사에 반환 후 추가 축성 기록이 남아 있는 성 (이상한 기록) : 길주성, 공험진 산성

즉, 축성 기록은 있으나 폐성, 반환 기록이 없는 모호한 성이 두 개입니다. 바로 공험진과 평융진이지요.
국역 고려사 각주에는 평융진 함경남도 함주로 비정하였습니다.


과연 금이 함락한 그 3성은 대체 어디일까요?


이상으로 길주 이남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엔 여러 실학자들이 주장한 마천령 이남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