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려 철수 작전에 공험진은 왜 빠졌는가?
고려사 1109년 7월 18일 기사中
최홍정 등은 그 이후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로부터 시작해 9성에 비축해 둔 전투 장비와 군량을 차례로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적인(狄人)이 기꺼이 자신들의 우마를 내어 우리 백성 가운데 그곳에 남겨진 남녀노소 백성들을 한 명도 해치지 않고 돌려보냈다.
고려사 1109년 7월 21일 기사中
○ 영주(英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와 복주(福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진양진(眞陽鎭)에 축조했던 성을 철거했다.
고려사 1109년 7월 22일 기사中
○ 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주군)와 웅주(雄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선화진(宣化鎭)에 축조했던 성을 철거했다.
고려사 지리지 中
○ 통태진(通泰鎭). 예종(睿宗) 3년에 성(城)을 쌓고 진(鎭)을 두었으며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숭녕진(崇寧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진양진(眞陽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선화진(宣化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다시 찾아 길주(吉州)에 병합(倂合)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中
예종 4년에 여진(女眞)이 또한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였다. 이에 비로소 길주(吉州)로부터 점차로 9성(城)의 전쟁물자와 군량을 내지(內地)로 거두어 들이고 드디어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진(鎭) 및 영주(英州)․복주(福州) 두 주(州)의 성(城)을 철수하고 또 함주(咸州)․웅주(雄州) 두 주(州) 및 선화진성(宣化鎭城)을 철수하여 이를 돌려 주었다.
→ 공험진 반환+폐성 기록 없습니다. 1109년 5월까진 공험진이 분명히 존재하였습니다.
→ 길주 폐성 기록 없습니다. 허나 반환되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아마도 적이 포위하고 있는 상태라, 폐성치 못하고 그냥 돌려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폐성기록이 남아 있는 성 : 영주, 복주, 함주, 웅주, 진양진, 선화진, 통태진, 숭녕진 → 8성
※폐성기록이 없는 성 : 길주, 의주, 공험진, 평융진 → 4성
※길주 → 1109년 7월 휴전 협정 직전까지 함락 당하지 않음
※의주 → 본시 덕원(문천~원산) 내지에 지은 성
※평융진 → 본시 1108년 3월에 축성된 진으로, 민호 5000호가 투입되었음. 이후 기록이 없음
※공험진 → 본시 1108년 2월에 축성된 진으로, 군정 532호와 백성 5000호가 투입되었음.
이후 1109년 5월에 오연총이 길주로 가기 위해 먼저 들린 곳이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