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30여일동안 병력 2천으로 여진 6만의 공격을 막아냈다.
즉 길주성은 마지막까지 주요 전장이었다.
허재 묘지명中
공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킨 지 무릇 130여 일이나 되자 (중략)
2천 남짓한 무리로 6만의 굳센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김의원 묘지명中
뒤에 적의 군사가 날로 강해져 길주(吉州)를 공격하니, 원수가 공을 불러 말하였다.
“길주가 고립되어 위험한데 원병이 없으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장차 적에게 떨어질 것이오.
그대가 그것을 막으시오.”
고려사 허재 열전中
9성(九城)을 축조할 때에 중군 녹사(中軍錄事)로 길주성(吉州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여진(女眞)이 침공하여 오니
허재가 병마 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과 더불어 수개월간이나 고수하였다.
성이 거의 함락되게 되니 허재가 병사들을 격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겹성(重城)을 쌓고 항전하여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길성현(吉城縣) 中
고려 허재(許載) 9성을 쌓을 때에 중군 녹사(中軍錄事)로 와서 이곳을 지켰다.
이때에 여진이 와서 공격하는데, 허재는 군대를 독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시 이중(二重)의 성을 쌓아 그들에 대항하니
적들이 물러갔다. 뒤에 또 길주(吉州)의 관문 밖에서 여진을 공격하여 3천여 명을 죽이고, 그들의 무장을 노획하였다.
그 공로로 잡단(雜端)에 승진되었다.
→ 우선 2천의 고려군이 6만의 여진인을 막은 것에 대한 비문은 과장이다고 볼수가 없는 것이
바로 비문이 건립될 당시 임금인 인종의 교서 인용문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직 임금의 비문을 가감하여 기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당시 허재는 이자겸과 척준경의 일파로 몰려 풍주로 좌천당하였다가
인종의 명으로 간신히 신원을 회복한 과정이 있는 인물입니다.
묘지명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간관의 탄핵을 당했고,
좌천된후 한 선비의 상소로 공을 인정받은 것이지요.
이런 그의 아들이 현직 임금의 교지를 조작할 수는 없었겠지요.
고려사에도 있듯이 고려와 여진의 전쟁 후반의 주요 전장은 길주였습니다.
여진의 대병력이 최전방 길주에 집중되었고, 길주를 구원하러 오는 고려군을 중도에서
여진군이 요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지요.
길공구가 파악한 사서 등에서 동북9성(실상 12성) 중 위치가 정확히 나와 있는 4성
A. 길주 : 현 길주
B. 복주 : 현 단천
C. 함주 : 현 함주~함흥
D. 의주 : 현 문천~원산
*동북9성, 총 12성 규모 및 군정 및 민호 편성 현황
- 함주성(咸州城) : 군정 1948호 + 백성 13000호
- 영주성(英州城) : 군정 1238호 + 백성 10000호, 성곽규모 950간(둘레 1.73km), 위치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
- 웅주성(雄州城) : 군정 1436호 + 백성 10000호, 성곽규모 992간(둘레 1.80km), 위치 화곶산(火串山) 아래
- 복주성(福州城) : 군정 632호 + 백성 7000호, 성곽규모 774간(둘레 1.41km), 위치 여진 오림금촌(吳林金村)
- 길주성(吉州城) : 군정 680호 + 백성 7000호, 성곽규모 670간(둘레 1.22km), 위치 여진 궁한촌(弓漢村)
- 의주성(宜州城) : 군정 + 백성 7000호
- 공험진(公險鎭) : 군정 532호 + 백성 5000호
- 통태진(通泰鎭) : 군정 + 백성 5000호
- 평융진(平戎鎭) : 군정 + 백성 5000호
- 숭녕진(崇寧鎭)
- 진양진(眞陽鎭)
- 선화진(宣化鎭)
*9성의 규모 환산 추정
성곽 규모와 군정, 배치된 백성수가 명확히 나와 있는 4성을 기준하여 평균하면
4성의 총간수는 3386간이며, 군정은 3986호이고, 백성은 34000호
평균하면 1간당 군정 1.18호, 민호 10.04호 임.
함주의 경우 군정이 1948호에 민호 13000호이니, 군정을 기준으로 하면 1650간, 민호를 기준으로 하면 1295간임.
의주의 경우 민호만 7000호이니, 697간, 참고로 똑같은 민호가 배정된 길주가 670간, 복주가 774간임.
공험진의 경우 군정 532호, 민호 5000호이니, 군정기준 450간, 민호기준 500간임.
통태진과 평융진의 경우 민호 5000호이니, 민호기준 500간임.
-함주성 : 1295~1650간 추정, 둘레 2.35~3.00km, 면적 345000~562500 ㎡ (약 10만4천평~17만평)
-영주성 : 950간, 둘레 1.73km, 면적 186600 ㎡ (약 5만6천평)
-웅주성 : 992간, 둘레 1.80km, 면적 202500 ㎡ (약 6만1천평)
-복주성 : 774간, 둘레 1.41km, 면적 124000 ㎡ (약 3만7천평)
-길주성 : 670간, 둘레 1.22km, 면적 93000 ㎡ (약 2만8천평)
-의주성 : 697간 추정, 둘레 1.27km, 면적 100000 ㎡ (약 3만평)
-공험진 : 450~500간 추정, 둘레 0.82~0.91km, 면적 42000~51600㎡ (약 1만3천평~1만6천평)
-통태진 : 500간 추정, 둘레 0.91km, 면적 51600 ㎡ (약 1만6천평)
-평융진 : 500간 추정, 둘레 0.91km, 면적 51600 ㎡ (약 1만6천평)
*파란글씨는 추정임
*9성의 관병 및 백성수 추정 (1호 5인 기준)
- 함주성 : 관병 약 2000 + 군인가족 약 9700명 + 백성 65000명 = 총합 약 76700 명 / 1인당 면적 1.36~2.22평
- 영주성 : 관병 약 1300 + 군인가족 약 6200명 + 백성 50000명 = 총합 약 57500 명 / 1인당 면적 0.97평
- 웅주성 : 관병 약 1500 + 군인가족 약 7200명 + 백성 50000명 = 총합 약 58700 명 / 1인당 면적 1.04평
- 복주성 : 관병 약 700 + 군인가족 약 3200명 + 백성 35000명 = 총합 약 38900 명 / 1인당 면적 0.95평
- 길주성 : 관병 약 700 + 군인가족 약 3400명 + 백성 35000명 = 총합 약 39000 명 / 1인당 면적 0.72평
- 의주성 : 관병 약 700 + 백성 35000명 = 총합 약 35700 명 / 1인당 면적 0.84평
→ 의주성은 군정 이주 기록 없음 / 관병은 민호의 배치가 비슷한 복주나 길주성과 비슷할 것이라고 추정하여 약 700명
- 공험진 : 관병 약 600 → 통태진은 군정 이주 기록 없음 / 관병은 민호의 배치가 같은 공험진과 비슷할 것이라고 추정하여 약 600명
- 평융진 : 관병 약 600 + 백성 25000명 = 총합 약 25600 명 / 1인당 면적 0.63평
→ 평융진도 군정 이주 기록 없음 / 관병은 민호의 배치가 같은 공험진과 비슷할 것이라고 추정하여 약 600명
→ 수성시 동원 병력은 금석문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의 길주성 수비병 2천명에 근거하면
길주는 관병 700 에 민병 1300 정도가 동원 된것으로 보여짐
1109년에 가면 길주성에 배치된 백성들이 그대로 있었을 것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음
고려의 전략이 완전히 틀어진 데다가, 현지 경작도 되질 않았을 것임으로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됨.
즉 고려의 초기의 수비 전략은 1성당 관병 600~2000 에다가 민병 다수를 동원하여 방어 한다는 구상이였던듯 싶은데
후기로 갈수록 민병의 동원력은 극히 줄어들어 관병의 약 2배 정도밖에 동원하지 못하였음
→ 대략 추정하여 1108년 4월 당시, 17만 동원군은 대부분 고려로 개선하였고,
관병 7천, 군인가족 3만3천, 백성 34만 총합하여 약 38만명 정도의 고려인이 동북9성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