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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점령한 3성은 어디? (5)

 현재 동북9성의 최전방에는 약 4가지 설이 있다고 하더군요.


1. 길주이남설 → 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주장
2. 함흥평야설 → 주로 일제 초기 일본학자들의 주장
3. 두만강 인근설 → 주로 세종실록 지리지 등 조선조의 주장 (공험진 내방소)
4. 두만강 이북설 → 주로 세종실록 지리지 등 조선조의 주장 (공험진 외방소)

각각의 설들은 말들이 많으니,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을 배제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우선 당대에 건립된 여진과의 전쟁에 직접 참전한 두 장수의 묘지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 中

9성을 개척하여 정할 때에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서 길주(吉州)에 들어가 지켰다. 당시 9성 중에서 오직 길주가 오랑캐 땅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졌다. 원수(元帥, 尹瓘)와 요속(僚屬)들이 모두 분발하여 구하고자 하였으나 두 번 세 번에 이르러서도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오랑캐들이 승기를 타서 하루는 날랜 군사로 공격하여 오니 그 성이 거의 오랑캐에게 패하게 되었다. 공이 홀로 기묘한 꾀를 내어 사람들에 명령하여 하룻밤 만에 서둘러서 겹성[重城]을 쌓게 하였는데, 성이 완성되니 오랑캐들이 모두 낙담하고 이에 물러갔다. 공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킨 지 무릇 130여 일이나 되자, 오랑캐가 마침내 진심으로 복종하고 간절하게 강화를 요청하였으므로 나라에서 허락하였다. 그 뒤 그 일을 보고하여 아뢰었으니, 아, 삼군(三軍)이 수령(首領)을 완전히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 때문이었다. 예종이 “선대의 임금이 국경을 평정할 때에 비록원흥(元興)과 자주(慈州)를 굳게 지켰다고 하지만, 이보다 앞서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예를 갖추고 임금을 알현하자, 노고를 매우 후하게 위로하고 절차에 따라 탁용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임금[仁宗]이 즉위하여 공훈을 논하면서 조서에서 말하였다.
“생각하건대 길주를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밖에서 원병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은 점점 급해져서 성은 무너지고 바야흐로 함락되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고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힘이 다하여 지탱하기가 어렵고 계책이 나올 것도 없었는데, 경이 이에 몸소 피곤한 병졸들을 독려하여 몰래 성벽을 겹으로 쌓았습니다. 몸을 비껴 성벽에 오르고 화살을 무릅쓰고 적을 막아, 2천 남짓한 무리로 6만의 굳센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군사들에게 공을 세우게 한 것은 오직 그대의 노력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선왕께서 장차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과인에 이르러 큰 공적을 생각하여 잊지 않고자 합니다”


김의원묘지명(金義元墓誌銘) 中
당시 예종(睿宗)이 선왕<肅宗>의 뜻을 이어 동쪽으로 여진(女眞)을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공은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었다. 공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사졸의 앞장에 섰다. 여진이 웅주(雄州)를 포위하자 공은 성을 지키면서 잇달아 싸워 이기며, 포로를 잡고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웠다. 뒤에 적의 군사가 날로 강해져 길주(吉州)를 공격하니, 원수가 공을 불러 말하였다. “길주가 고립되어 위험한데 원병이 없으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장차 적에게 떨어질 것이오. 그대가 그것을 막으시오.” 공이 지병마사(知兵馬事) 이관진(李冠珎), 병마판관(兵馬判官) 허재(許載) 등과 더불어 성에 들어가 지켰다. 적의 우두머리가 원근의 이리 같은 무리를 모아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으나, 공은 사졸들과 어려움과 기쁜 일을 함께 하며 밤낮으로 굳게 지켰다. 원수가 이끄는 구원병이 패배하자 적들이 승세를 타서 하루는 목책을 부수고 성벽을 치면서 바람을 타서 불을 놓았다. ▨ 성이 거의 무너져 함몰되려 하였으나, 공이 한 명을 때려죽이고 드디어 꾸짖으니 적의 무리들이 조금 물러났다. 마침 날이 저물자 공은 사졸들을 격려하여 겹성[重城] 26칸을 쌓았다. 새벽이 되자 적이 바라보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 탄복하였다. 이로부터 성을 함락시킬 뜻이 없어져 화의를 청하였다. 공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뜻에 따라 드디어 화의를 허락하였다.
포위된 성을 지키고 있을 때 적은 매번 바람을 타고 떠들어대니 사람들이 모두 안색이 변하였다. 공은 태연한 낯빛으로 더욱 사졸들을 격려하자 사람들이 이에 안정되어 모두 공의 의로운 용기에 탄복하였다. 무릇 고립된 군사로 위급한 성을 지켜서 적의 수많은 악한 무리들이 성을 함락시킬 뜻을 못가지게 하고 성문을 두드리며 화의를 청하게 한 것은 공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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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주는 9성 중 여진과의 최전방이었다.
拓定九城以兵馬判官入守吉州其時九城中唯吉最近虜境以故虜攻之日甚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써 구성(九城)을 척정(拓定/개척하여 정함)하여 
길주(吉州)에 입수(入守/들어가 수비함)하였다.
그때 구성(九城) 중(中)에 
오직(唯) 길주(吉)가 노경(虜境/오랑캐와의 국경)이 최근(最近/가장 가까움)하여,
이런 연고로(以故) 노정(虜攻/오랑캐의 공격)이 일심(日甚/나날이 심해짐)하였다.

→ 사실 동북9성은 축성 자체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하여 축성한 것입니다.
    고려의 군 전략 자체가 병목과 요충지를 막고, 백성을 옮겨 축성한 후 토지를 경작하여 
    영구히 정착지로 삼는다였는데, 막상 점령하고 보니, 
    여진이 말하는 갈라전은 동으로는 바다요, 북으로는 산으로
    비록 산과 바다길이 험준하다 하나, 모두 개방되어 있어 
    여진이 공격하지 못할 곳이 없었다는 이야기 이지요.
    이는 1107년 12월부터 시작한 축성이 3개월도 안돼 길주와 공험진을 포함한 6성을 급하게 짓고
    69000호, 약 34만명의 백성을 이주시킨 전략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뜻입니다.
→ 초기에 건립된 6성 중 길주, 영주, 웅주, 복주, 함주는 어느 곳이나 여진과의 전쟁이 가능한 
    지역이었습니다.
→ 그러나 주로 여진 부족 분포도로 살펴보면 송화강 부근의 생여진으로부터 갈라전으로의 이동로는
    동북부에서 부터 내려 오는 길임으로, 이동로로 따지면 최전방은 존재하였습니다.
→ 바로 그곳이 길주


길공구가 파악한 사서 등에서 동북9성(실상 12성) 중 위치가 정확히 나와 있는 4성
A. 길주 : 현 길주
B. 복주 : 현 단천
C. 함주 : 현 함주~함흥
D. 의주 : 현 문천~원산
당시 생여진 부족 분포도 및 이동로 (송화강 유역 → 두만강 유역 → 갈라전 유역)
-2부 [길주성은 2천으로 6만을 막아낸 후반기 최전방 주요 전장이었다.] 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