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中
(경원의)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 40리, 남쪽으로 연해 굴포(連海堀浦)에 이르기 12리,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 1백 50리이다.
→ 경원내에 최북단 공험진, 최동북단 선춘현이 있다. 즉 선춘현은 두만강을 넘어가지 않는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碑)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대체 공험진 외방소 두만강 이북 700리 선춘령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조선왕조실록 1437년 5월8일 기사中
함길도 절제사에게 야인을 대할 태도를 지시하다
함길도 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감사가 아뢰기를, ‘범찰(凡察)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이만주(李滿住)가 장차 성지를 받들고 온다.」고 하였고, 전해 들으니, 범찰과 더불어 한 곳에 모여 살고자 하옵니다.’고 하였는데, 만약에 이와 같다면 우선 대답하기를, ‘회령(會寧)은 바로 공험진(公嶮鎭)안에 매인 본국의 땅이요, 전에 비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가 거주하기를 청하기에 허락하여 너희들이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다. 현재 본 땅에 부를 설치하고 수령을 두었는데, 거주[接住]하기를 허락하는 논의는 우리 변장(邊將)들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너희들의 임의로 할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조정의 명령이 없는 데서이겠는가.’고 함이 마땅하고, 응답(應答)한 말을 모름지기 즉시 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