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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3)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이성계 일족이 당시 여진땅이었던 [갈라전], 여진어로 [하라 온/카라 온]에 살던 시절 불렸던 

여진+몽고 이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할아버지 이춘 [부얀 터무르]

2부-큰 아버지 이자흥 [타스 부카]

3부-아버지 이자춘 [오로스 부카]


4. 이성계의 사촌 형 이천계

-고려 이름 : 이천계(李天桂)
-한문명 : 교주(咬住), 아명.
-갈라전 시절 인명 : 요오주[yooju]
-뜻 : 불명.
-이씨 가문의 적장자 이자흥의 아들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자춘이 임시로 다루가치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이천계가 다루가치가 되는 일은 그 후로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도조가 죽자 어린 교주 대신 임시로 환조 이자춘이 관직을 계승하다
지정(至正) 2년(1342) 임오 7월 24일에 도조가 훙(薨)하였다. 함흥부(咸興府)의 예안부(禮安部) 운천동(雲天洞)에 
장사지내니, 곧 의릉(義陵)이다. 탑사불화(塔思不花)가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照勘)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正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9월에 탑사불화가 돌아가[卒]니, 아들 교주(咬住)가 어리[幼]었다. 
(중략)
지정(至正) 3년(1343) 정월에 원(元)나라에서, 조씨는 적실(嫡室)이 아니고, 교주(咬住)는 유약(幼弱)하다고 하여, 
환조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丁年)이 됨을 기다려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흠정원사어해 9권中
耀珠
卷一百七作咬住係宗室諸王卷十七作齩住非一人因無解義但改字面〉
요주(耀珠)
107권(卷)에는 교주(咬住)라 작(作)하였는데, 종실(宗室)의 제왕(諸王)에 계(係)한다.
17권(卷)에는 교주(齩住)라 작(作)하였는데, 1인이 아니다.
해의(解義/뜻을 해석함)할 수 없음으로 인(因)하여, 단지(但) 자면(字面)만을 개(改)한다.

요오주[yooju]
107권에는 교주라 쓰여 있는데 종실의 여러 왕에 관계한다.
17권에는 교주라 쓰여 있는데 같은 사람이 아니다.
뜻을 해석하지 못하였고 단지 글자의 모양만 (요주로 통일하여) 바꾼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교주(咬住)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恭愍王)을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 군기 윤(中順軍器尹)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