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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육조는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 (3)

 판삼사공(判三司公 : 이성계)은 먼저 부인 한씨(韓氏)는 원신택주(元信宅主)로 봉해졌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은퇴한 경(卿)의 딸이다. 아들 방우(芳雨)는 전 예의판서(禮儀判書)이며, 방과(芳果)는 추충여절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推忠礪節翊衛功臣 奉翊大夫 知密直司事 兼 軍簿判書 鷹揚軍上護軍)이며, 방의(芳毅)는 중정대부 신호위대호군(中正大夫 神虎衛大護軍)이며, 방간(芳幹)은 전 군기소윤(軍器少尹)이며, 방원(芳遠)은 통직랑 예의정랑 지제교(通直郞 禮儀正郞 知製敎)이며, 방연(芳衍)은 종사랑 성균박사(從仕郞 成均博士)이다. 딸 둘이 있으나 모두 어리다. 후취(後娶) 강씨(康氏)는 보령택주(保寧宅主)를 봉해졌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이다. 아들 방번(芳蕃)은 고공좌랑(考功佐郞)이며, 방석(芳碩)은 군기록사(軍器錄事)이고, 딸은 대호군(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의 아들 경(卿)은 진사(進士)이며, 후(候)는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이다. 나머지 사(師) 부(傅) 보(保) 백(伯)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집에 있고, 차녀는 내부부령(內府副令) 임맹양(林孟陽)에게 시집갔다.

완산군(完山君 : 李元桂)은 문씨(文氏)를 재취(再娶)하여 아들을 낳았다. 양우(良祐)는 전 사복정(司僕正)이며, 천우(天祐)는 전 호군(護軍)이다. 딸은 전 중랑장(中郞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김씨(金氏)는 찬성사(贊成事) 용(鏞)의 딸이다. 아들 조(朝)는 진사(進士)이며, 서(曙)는 전 낭장(郎將)이며,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에게 시집갔다. 다음 두 아이는 모두 어리다.

동지공(同知公 : 李和)의 재취(再娶) 안씨(安氏)는 영동정(令同正) 종기(宗寄)의 딸이다. 아들 지숭(之崇)은 전 연경궁부사(延慶宮副使)이다. 노씨는 경원군(慶原君) 은(訔)의 딸이다. 아들 숙(淑)은 진사(進士)이며, 징(澄)은 별장(別將)이며, 다음 세 명은 모두 어리다. 딸 하나 역시 어리다.

판서(判書 : 방우)는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복근(福根)이며, 딸 셋은 모두 어리다. 대호군(大護軍 : 방의)은 간성(杆成)의 수령인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은 석근(石根)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소윤(小尹 : 방간)은 판도판서(版圖判書)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맹중(孟衆)이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정랑(正郞 : 방원)은 판전교(判典校) 민제(閔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색(穡)이 계묘년(공민왕 12, 1363)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이듬해 판삼사공(判三司公 : 이성계)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판삼사공이 지문하(知門下)에 임명되었을 때 나는 사공(司空)으로 정당(正堂)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근신(近臣)들에게 묻기를, “문신(文臣) 색(穡)과 무신(武臣) 성계(成桂)가 같은 날 입성(入省)하였는데 조정의 여론들은 어떻다고 하느냐?” 하였다. 대체로 스스로 자랑하는 말이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동렬(同列)에 있던 자가 적고 나는 공(公)과 더불어 물처럼 담담(淡淡)하여 오래도록 서로 공경하는 풍모를 가지니 사람들은 간혹 우리들을 사모하였다. 그러니 감히 공의 아버지 보기를 나의 아버지 보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의 신도(神道)에 명(銘)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내 이씨(李氏)의 계보를 상고해 보니,

신라의 대아간(大阿干) 인물이 뛰어나고 슬기로와 이미 임금의 제정(祭政)을 도왔네.

후(厚)한 봉록으로 벼슬하는 고관이 대대로 많았네.

오마(五馬)로 삭방(朔方)에 노닐어 위엄과 은혜 아울러 드러났도다.

그 곳의 풍속을 즐겨 머물러 사니 삼척(三陟)은 고향과 같도다.

수령이 원망하는 말 있기에 몸을 빼쳐 원(元)나라로 들어갔네.

천부장(千夫長)의 임명을 받았으니 덕망이 있어 백성들이 은혜를 품었으며,

온화하고 공손하게 옛 임금을 섬기니

조빙(朝聘)은 어이 그리 부지런하였던고.

근본을 보답하고 또 처음에 돌아가서 세속을 깨우치고 따라 공훈도 이루었네.

더구나 우리의 시중공(侍中公)은 공민왕(恭愍王)이 그 충성을 크게 칭찬하였네.

하늘은 어찌하여 그를 빼앗음이 급하였는가.

백성들의 궁(窮)과 통(通)은 누가 맡아 다스릴까.

판삼사(判三司)인 아들이 있어서 공훈과 명망이 한 세상에 으뜸이며

자손들이 모두 귀현(貴顯)하였으니, 천도가 무지(無知)함은 아니로다.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는 반드시 무성하며, 근원이 멀면 흐름은 길다.

나의 졸렬한 것이 부끄러우나 명시(銘詩)는 천년으로 밝은 빛을 끼치리라



-조선 건국 후에 이성계의 가문 내력이 조작 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 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