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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3)

 1108년이 되자 여진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됩니다. 어쩌면은 금의 건국엔 고려의 여진 정벌이 크나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필자의 생각입니다. 1107년까지만 해도 여진은 부족마다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었는데, 1107년 고려의 대대적인 공격에 여러 부족들이 전멸을 당하자 여진 부족들은 서로 힘을 합쳐 고려에 대항하게 됩니다. 그전에 고려가 조우한 여진의 수는 기껏해야 수천정도에 불과했는데, 1108년부터는 수만단위로 반격하게 됩니다. 당시에 고려군이 여진을 정벌할때 취한 정책은 여진 섬멸작전에 가까웠습니다. 항복하거나 사로잡은 자보다 수급을 벤자가 월등히 많았습니다. 이는 고려가 작정하고 여진족을 아예 섬멸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지요. 

 

아래 1108년 1월 기사를 보겠습니다.

 

예종 3년(1108년) 1월 을축일에 윤관ㆍ오연총이 정병 8천을 거느리고 가한촌(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나가니, 적이 군사를 풀숲 사이에 매복하고 있다가 윤관의 군사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서 이를 급히 공격하여, 우리 군졸이 모두 무너지고 다만 10여 명이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오연총은 화살에 맞아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구하려 하자, 그 아우 낭장(郞將) 척준신(拓俊臣)이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니, 헛되이 죽음은 무익합니다." 하였다.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라. 나는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있을 수 없다." 하고 곧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적진을 뚫고 들어가 10여 명을 격살하니 최홍정ㆍ이관진(李冠珍) 등이 산골짜기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하였다. 이때에 적이 포위를 풀고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36급을 베었고 윤관 등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와 영주성으로 들어갔다. 윤관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척준경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너를 마땅히 아들과 같이 보고, 너는 마땅히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 하였다. 제를 받들어 척준경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였다.

 

정축일에 적의 보병ㆍ기병 2만이 영주성 남쪽에 와서 주둔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도전하였다. 윤관이 임언과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형세가 대적할 수 없으니, 다만 굳게 지켜야만 할 뿐이다."고 하니 척준경이 말하기를, “만약 나가 싸우지 않으면, 적병은 날로 늘고 성 안에는 군량이 다 되며, 밖으로부터는 구원병이 이르지 않으면 장차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지난날의 승첩을 제공은 보지 않았는가. 오늘도 나가 죽기를 무릅쓰고 힘껏 싸울 테니 제공은 성에 올라가 이를 보라." 하고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적병과 싸워 19급을 베니 적이 패배하여 북으로 달아났다. 척준경은 북과 피리를 울리며 개선하였다. 윤관 등이 누대에서 내려와 이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서로 절을 하였다. 윤관ㆍ오연총은 이에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로 모였다.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성(公險城 함북 회령(會寧))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도독부에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추장 사현(史現)의 군사를 만나 이와 싸우다가 패하여 타고 있던 말을 잃었다. 
척준경이 곧 날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하여 적을 패퇴시켜, 오랑캐의 갑옷 입힌 말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번에도 척준경의 용맹이 대단하였지요.^^. 계급도 녹사(정8품)에서 합문지후(정7품)으로 1등급 승급도 하고.
척준경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1108년 2월기사

2월 임진일에 여진의 군사 수만 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최홍정이 사졸을 타이르고 격려하니, 여러 군사가 전의를 가지게 되었다. 곧 4문을 열고 일제히 나가서 분발ㆍ공격하여 크게 이겼는데, 사로잡고 벤 것이 80급, 병거(兵車) 50여 량, 중거(中車) 2백 량, 말 40필을 노획하였고, 그 외에도 노획한 무기는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이때 척준경은 성 안에 있었는데, 주수(州守)가 말하기를, “성을 지킨 지 날이 오래되어 군량이 다 되어가고, 밖으로부터의 구원병은 이르지 않았으니, 공이 만약 성을 나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구하지 않는다면 성 안의 군사는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척준경이 군사의 해진 옷을 입고 밤에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가, 정주로 돌아가서 군사를 정돈하고 통태진(通泰鎭)을 통과하여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에 이르러 적을 맞아 싸워 크게 부수니, 성 안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점점 여진의 반격이 거세져 고려가 수세에 몰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척준경의 단독행동이 돋보였습니다. 가히 죽음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었던듯 싶습니다.

 

 

1108년 8월기사

8월 행영병마판관 왕자지ㆍ척준경이 여진과 함주ㆍ영주 두 주에서 싸워 33급을 베었다.

 

1108년 9월기사

9월 왕자지ㆍ척준경이 또 여진을 사지령(沙至嶺)에서 쳐 27급을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

 

정3품의 왕자지(王字之)와 콤보를 이루어 약간의 전과를 올리는군요.

 

 

1109년 5월기사

5월에 왕이 척준경이 여러 번 전공이 있었다고 해서 그의 아버지 검교대장군 척위공(拓謂恭)을 내전으로 불러보고, 조용히 위로하고 술과 음식, 은 한덩이, 멥쌀 10석을 하사하였다.

 

북방에서의 척준경의 활약에 힘입어 척준경의 부 척위공은 왕궁에까지 초대받아 예종께 하사품을 받습니다. 가문의 영광이 아닐수 없군요.

 

하지만 고려는 이때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동북9성을 힘겹게 쌓아서 지키고 있었지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여진은 타지의 유목민까지 끌어들여 동북9성에 죽기살기로 덤벼듭니다. 비록 고려는 성을 지켜내기는 하였지만, 사상자가 너무나 많아져, 중앙정부에 계속 병력증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때마침 고려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죽는 시체가 사방에 널리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게다가 여진도 동북9성을 돌려주기를 간절히 요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죽기살기로 덤벼드니 고려조정은 가부 용단을 내려야할때가 온것입니다. 화친이냐? 여진섬멸이냐? 게다가 거란마져 여진의 편을 드니 결국 화친쪽으로 조정의 의견이 좁혀지게 됩니다.

게다가 여진에서 사신이 와서 다음과 같이 간청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