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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4)

 1109년 6월기사

요불(여진사신) 등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해야 한다 하였고, 지금 태사 오아속이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알았습니다. 근자에 궁한촌(弓漢村) 사람이 스스로 불안하게 일을 일으킨 것이요, 태사의 지휘가 아닌데 국조(國朝 고려)에서 경계를 침범한 죄로 토벌하였고, 다시 수호를 윤허하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더니, 뜻밖에 작년에 대거 들어와 우리 늙은이와 어린이를 죽이고, 9성을 쌓아 남겨진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 편안히 돌아갈 곳이 없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 때문에 태사가 저를 보내서 옛 영토를 돌려 달라고 청하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가엾게 여겨 9성을 돌려 주기를 윤허하여 우리들을 편안히 살게 해 주시면, 우리들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를 하고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세공을 정성껏 닦고, 또 감히 기와와 작은 돌도 경계 위에 던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위로하고 타이르며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드디어 1109년 7월에 예종은 동북9성을 돌려주라 명하게 됩니다. 이에 7월 고려 전군은 동북9성에서 후퇴하게 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영원히 고려에 충성하겠다던 여진족은 훗날 이 동북9성을 기반으로 금나라를 세워 동북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고, 고려를 아우국으로 삼게 됩니다.

 

1109년 7월기사

7월에 재신과 추신 및 대성(臺省)ㆍ제사(諸司)ㆍ지제고(知制誥)ㆍ시신ㆍ도병마판관 이상 문무 3품 이상을 선정전에 모아 9성을 돌려 주는 일을 의논하니, 모두 돌려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다. 왕은 선정전에 거둥하여 요불 등을 인견하고 9성을 돌려 줄 것을 윤허하였다. 요불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사례하였다.
행영병마별감 승선 최홍정과 병마사 이부상서 문관 등이 여진 추장 거울이(居熨伊)에게 선유(宣諭)하기를, “너희가 만약 9성을 돌려 줄 것을 청할진댄, 마땅히 이미 맺었던 약속대로 하늘에 맹세하여 고하라." 하였다. 추장 등이 단을 함주문 밖에 설치하고 맹세하여 고하기를, “이제부터 나쁜 마음을 버리고 대대로 조공을 드릴 것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번토(蕃土)는 멸망하리라." 하였다. 맹세를 마치고 물러갔다. 홍정 등이 비로소 9성을 철수하여 길주로부터 차례로 전투장비ㆍ식량을 내지로 거두어들였다. 여진은 기뻐하여 그들의 소와 말로 뒤에 처진 우리 백성의 노유ㆍ남녀를 실어 돌려보내고, 한 사람도 살상함이 없었다. 임의 등은 지체되어 국경의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여진과의 기나긴 전쟁은 끝이 나고, 척준경은 군공으로 위위시에 들어가 정6품 위위소경으로 진급하게 됩니다.

위위시는 태봉과 고려초에는 왕의 친위부대인 내군(內軍)으로 불리웠으며, 내군이 목종과 현종때 응양군과 용호군 2군으로 개편되면서 

위위시는 왕의 의장만을 맡게 됩니다. 의장부대인 천우위의 상급 관청이라고 봐도 될듯합니다.

훗날 무신정권 초기에 이고가 위위시의 수장인 위위경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위위시는 왕의 최측근 관청이었습니다.

 

 

 

여기서 척준경의 고려사 기사가 끝이 났더라면, 척준경은 아마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충신열전에 들어갔을 것인데,

 

2부

 

오늘은 여진과의 전쟁이 끝난후 요동치던 동북아 국제정세에 대해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전부 정사(고려사,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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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이 난지 6년이 흘러 1115년 고려 예종11년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고려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부족통합을 이루워낸 여진은 드디어 아골타가 안출호수(按出虎水=후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의 북만주 하얼빈)에서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연호를 수국(收國)이라 정하여 발해 멸망이후 최초로 국가를 세우게 됩니다. 국호를 금이라 칭한것은 당시 안출호수가 금산출지라서 그랬다고 합니다. 혹은 아골타가 신라의 패망이후 마의태자 김일의 후손(박성수 교수의 논문)이라 금이라 정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골타가 우리 한민족 출신이라는 것은 당시 사서에 기록이 되기도 했습니다.

 

 

1109년 예종 4년(1109) 고려사절요 기사中

<6월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상주하여 아뢰기를, "옛날 우리 태사 영가(盈歌)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1115년 예종10년 고려사절요 기사中
<1월 생여진의 아골타(阿骨打)가 황제라 칭호하고 이름을 민(旻)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거주하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끈을 매어 약속하였다. 그 지방에 돼지ㆍ양ㆍ소ㆍ말이 많고, 말은 준마가 많았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아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을 달리고 전투를 연습하여 강병이 되는데, 여러 부락이 제각기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 지방이 서쪽은 바로 거란이요, 남쪽은 바로 우리나라 땅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겼는데, 조회하러 올 때마다 부스러기 금ㆍ담비가죽ㆍ좋은 말을 폐백으로 삼았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은과 폐백을 후히 주어 해마다 그렇게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 황해 평산)의 중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하며 고을(古乙)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劾里鉢), 막내아들을 영가(盈歌)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웅호걸스러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여진이 발호하자 거란은 다급히 고려에 원군을 청하게 됩니다. 이때 척준경은 위위시의 정6품 위위소경이었는데, 원군의 가부를 결정하는 회의석상에서 거란의 원군요청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건의합니다. 당시의 조정회의에서는 대장군(종3품) 이상만이 참석하였는데, 이회의에 6품 척준경이 참석한것을 보면, 척준경이 예종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12세기 고려조정을 이끌었던 김부식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아래 기록을 살펴보죠.

1115년 예종11년

8월에 요 나라에서 여진을 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청병하였다. 재추ㆍ시신ㆍ도병마판관과 여러 위(衛)의 대장군 이상을 불러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파병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오직 위위소경(衛尉少卿) 척준경(拓俊京)과 예부낭중 김부일(金富佾), 호부원외랑 한충(韓冲), 우사간 김부식(金富軾)ㆍ우정언 민수(閔修)가 국가에서 정해ㆍ무자의 전란(예종 2~3년의 여진 정벌) 이후로 군사와 백성들이 겨우 어깨를 쉬게 되었는데, 지금 타국을 위하여 군사를 출동한다면 이것은 자진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니, 장래의 이해가 어찌 될지 두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재삼 가부를 물었으나 끝내 결정된 의논을 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