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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정벌 간단 요약 (4)

 → 수성시 동원 병력은 금석문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의 길주성 수비병 2천명에 근거하면

    길주는 관병 700 에 민병 1300 정도가 동원 된것으로 보여짐
    1109년에 가면 길주성에 배치된 백성들이 그대로 있었을 것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음
    고려의 전략이 완전히 틀어진 데다가, 현지 경작도 되질 않았을 것임으로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됨.
    즉 고려의 초기의 수비 전략은 1성당 관병 600~2000 에다가 민병 다수를 동원하여 방어 한다는 구상이였던듯 싶은데
    후기로 갈수록 민병의 동원력은 극히 줄어들어 관병의 약 2배 정도밖에 동원하지 못하였음
    → 대략 추정하여 1108년 4월 당시, 17만 동원군은 대부분 고려로 개선하였고, 
        관병 7천, 군인가족 3만3천, 백성 34만 총합하여 약 38만명 정도의 고려인이 동북9성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고려군 획득상황(1107년 12월~1108년 3월간)
 - 1107년 12월 14일~ 24일 10일간총 136개촌 격파, 4940명 참수, 1030명 포로
 - 1107년 2월 윤언순(尹彦純)이 올린 표문에는 살상 5천, 포로 5천
 - 1107년 2월 임언이 지은 영주척벽기에는 참수한자가 6천, 항복한자 5만 으로 기록 하였음.
    그러나 고려군을 정병 30만이라 기록 하기도 하여, 승전비의 경우 과장이 있을 수 있음.
    허나 참수한자가 6천이라는 기록은, 전후 기록을 살펴 보아도 사실에 가깝고,
    포로가 아닌 항복한자라고 기록한것으로 보아, 여진의 남녀노소가 다량으로 항복하였을 가능성도 있음으로
    항복 5만명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음
 - 자진 투항의 경우 1107년 12월 추장 요을내외 3200명 / 1108년 1월 추장 가로환외 403명 / 1108년 1월 남녀 1460명 으로
    총 5063명
 - 획득 영토 면적(길이가 아님) 약 300리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 조선 함길도(현재의 함경남북도)가 남쪽 철령에서 북쪽 공험진까지 총 1700리이니
    단순계산하면 함길도의 약 18%를 차지한다고 볼수 있음.


*고려사에 기록된 임언의 영주 척벽기中
 점령한 지방은 면적이 3백 리며 동녘으로는 대해에 접했고 서북방에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녘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사람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가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 증거로는 낡은 비석과 유적이 오늘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그런즉 전일에 고구려가 잃었던 영토를 금일에 성상께서 다시 찾으신 것이니 이 아니 천명인가! 
 이에 새로 여섯 개 성(城)을 설치하였으니 
 첫째는 진동군 즉 함주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兵民)이 1천9백48 정호(丁戶)요. 
 둘째는 안령군 즉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천2백38 정호요. 
 셋째는 영해군 즉 웅주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천4백36 정효요. 
 넷째는 길주 방어사(吉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백80 정효요. 
 다섯째는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백32 정효요. 
 여섯째는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5백32 정호이다. 
 이상 각 성의 주민들 중에서 현명하고 재간이 있어서 능히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지방을 진무(鎭撫)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곧 시경에 이른바 
 <정복하고 선무하여 왕실의 울타리로 삼았다(于蕃于宣以蕃王室)> 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동녘 국경에 대한 근심이 없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내용을 고려사에서는 항복한자 5만명, 고려사를 보고 강역한 해동역사 지리고에는 5천으로 되어 있음
  고려사 찬자가 오기한 것인지는 알수 없으며, 이를 왜 해동역사 한치윤 선생은 5천으로 수정한 것인지 연유를 알수가 없음
  개인적으로는 왜 五萬餘口라고 표기하면 간단할것을 굳이 五十千餘口 로 기록 했는가에 대해
  고려사 찬자가 오기한 것으로 보여짐. 정황상 또한 동시기 윤언순의 표문에 근거하면
  1108년 3월 당시 포로수는 5천명이 맞다고 생각됨.
  그러나 포로수를 제외하고 이당시 자발적으로 투항한 여진인이 남녀 5천명이 넘음으로,
  1108년 3월 당시 고려의 수중에 있었던 여진인은 최소 5천에서 최대 1만으로 보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