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태조가 환조의 적장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하다
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태조의 종[奴]이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用事]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의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태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어
그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 결론 → 이천계의 이름은 요오주[yooju]로 여진어로 추정된다.
이씨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 이자춘이 다루가치가 된다.
이자춘의 뒤를 이어 이성계가 가통을 잇자 자신이 적통이었다는 이유로 태조에게 앙심을 품었다.
p.s) 태조실록의 <初桓祖薨, 天桂自以爲嫡嗣, 心忌太祖>
<처음에 환조(이자춘)이 훙하자, 이천계가 스스로 자신이 적통이라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태조를 시기하였다.>
이 부분 때문에 이자춘의 장남인데 이자흥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추정도 나오며
심지어는 고종 당시에는 이자춘의 장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이유로 영성대군(永城大君)에 추봉되었다.
승정원일기 1872년 12월 4일 기사中
완성군(完城君) 천계(天桂)를 영성대군(永城大君)에 추봉하였는데,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첫째 아들이다.
그러나 이자춘의 장남이어서 이성계에게 앙심을 품은 것이 아니라
이자춘이 자신의 아버지 이자흥 사후 가통을 가로채고 약조대로 돌려주지 않은 것과
이성계가 가통을 이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것으로 길공구는 생각한다.
이후의 혼동은 이런 것에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P.S2) 요오주, 즉 이천계는 조선 개국 원년에 살인했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이성계가 구해 주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죽었다는 게 의구심이 든다.
-5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