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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의 두만강 도하 가능성 (5)

 고려사 숙종 9년 1104년 1월 8일 기사中

계미일. 왕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간(林幹)을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선정전(宣政殿)에서 그에게 부월(斧鉞)을 준 후 가서 대비케 하였다. 또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위(李瑋)를 서북면행영병마사(西北面行營兵馬使)로, 위위경(衛尉卿) 김덕진(金德珍)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했다.
무자일. 서여진의 종곤(從昆)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판병마사는 일반적으로 종2품 이상의 재상이 임명되며,
병마사는 3품이 임명되지요. 행영은 임시로 조직된 부대를 뜻합니다.
하면 과연 개경에서 중앙군이 파병되어 정주로 향하였는가? 
아니면 정주 인근의 진에서 병력을 빼내 정주에 합하였는가?
아니면 임간만이 정주에 파병되어 정주성의 병력만으로 싸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 그럼 당시 고려의 최동북방 동계에 편성된 13개 성에 배치된 병력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여진정벌전 동북면 13진 포진 + 병력 배치도 http://cafe.naver.com/booheong/89357




당시 고려 동계에 편성된 주진군은 총 32성 약 24000 병력입니다.
이중 최동북면 13성에 배치된 병력은 약 7000 이구요.

한편 이때 석적환의 병력이 사서에 파악되는 부분은 아래와 같이 두 군데가 있습니다.


금사 고려전 1104년 기사中
○ [강종(康宗)] 2년 갑신(甲申)(1104)에 고려(高麗)가 쳐들어오자, 석적환(石適歡)이 크게 쳐부수어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고려(高麗) 국경까지 추격하여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4월에 고려(高麗)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石適歡)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闢登水) 에서 방어하여 또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闢登水)로 들어가 그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이에 고려왕(高麗王)은 “국경의 분쟁을 충동질한 자는 모두 [갈라전(曷懶甸)의] 관속(官屬) 상단(祥丹)· 방도리(傍都里)· 석필한(昔畢罕) 무리들이었다.” 고 하며, 단련사(團練使) 14명과 6로(路)의 사자(使者)로서 고려(高麗)에 있던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동시에 사신을 보내와 강화(講和)하자고 요청하였다. 마침내 사갈(斜葛)로 하여금 국경을 바르게 정하도록 하니, [그는] 을리골수(乙離骨水)와 갈라전 활치수(曷懶甸 活襧水)에 이르러 2개월을 머물렀다.


고려사 예종 원년 1106년 3월 5일 기사中
○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동여진의 지훈(之訓)이 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관성(關城) 밖에 와서 진을 친 다음 화친을 청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해의 전투는 새 왕께서는 모르시는 일로서, 제가 공아(公牙)를 입조시키자 이 뜻으로 타이르신 후 후한 상까지 주어 돌려보내셨으니 그 큰 은혜를 어찌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근실히 조공을 바치기를 원합니다.”

금사에는 500, 고려사에는 2000 으로 되어 있네요.
즉 500 ~ 2000 병력이 석적환이 이끌던 기병으로 생각되네요.
그렇다면 갈라전의 규모는 얼마나 되고, 여기서 모병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될까요?
다음 편에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