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요나라는 국외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서남쪽에서는 송이 국력을 회복하여, 북진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며, 동남쪽에서는 금이 강병을 이끌고 변경을 침략하였고, 1116년 3월에는 동경에서 발해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유수 소보선(蕭保先)을 죽이고, 발해유민 고영창(高永昌)을 황제로 옹립하고 국호를 대원(大元), 연호를 융기(隆基)라 칭하였습니다. 당시의 거란의 유일한 동맹국은 고려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태조 왕건의 유훈에 따라 실상은 거란을 원수로 여기고 있었지요. 급기야는 1116년 4월에는 각종 공문서에서 요나라의 연호를 삭제토록 지시까지 내리게 됩니다.
1116년 8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8월에 금(여진족)이 요(거란족)의 내원,포주(평북 의주 부근) 두성을 공략하여 거의 함락직전에 이르자, 당시만 해도 여진족을 속국으로 여기던 고려조정은 다음과 같이 금나라에 사신을 보냅니다.
<포주는 원래 우리나라 옛땅이니 돌려보내기를 원한다.>
이에 아골타가 보낸 답서에 고려는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금 나라 임금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스스로 빼앗으라."고 하였다.>
해가 바뀌어 1117년 3월까지 항거하던 내원,포주의 거란족은 배 140척을 이끌고 해상으로 탈출하면서, 고려에 내원,포주의 두성을 고려에 넘긴다는 통첩을 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이에 영덕성의 고려군이 두성을 접수해 버립니다. 이에 만조백관이 두성을 회복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금임금 아골타는 사신편으로 고려 조정에 아래와 같이 글을 보냅니다.
1117년 3월 기사中
금 나라 임금 아골타가 아기(阿只) 등 5명을 시켜 글을 부쳐 보냈는데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고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조심스럽게 섬겨 왔는데 거란이 무도하게 우리 강토를 짓밟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삼으며, 여러 번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득이 항거하였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섬멸하게 되었으니 왕은 우리에게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 대대로 무궁히 좋은 사이가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좋은 말 한 필을 보낸다."고 써 있었다.
글이 도착하니 대신들이 화친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는데, 어사중승 김부철(金富轍)이 상소하기를, “금 나라 사람들이 대요를 격파하고 새로 사신을 우리에게 보내어 형제의 나라가 되어 대대로 화친하기를 청하였는데,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한 나라가 흉노에게, 당 나라가 돌궐에게, 혹은 신(臣)이라 칭하고, 혹은 공주를 시집보내어 화친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였으며, 지금 송 나라도 거란과 서로 백숙(伯叔)ㆍ형제간이 되어 대대로 화친하고 있습니다. 천자의 지존으로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는 처지임에도 먼 오랑캐 나라에게 굽혀서 섬기니, 이것이 이른바 성인이 권도로써 도를 이루고 국가를 보전하는 양책인 것입니다. 옛날 성종조에서 국경 지대 일을 처리하는 데에 실수하여 요 나라의 침입을 재촉하였던 사실은 참으로 거울삼아 경계할 만한 일입니다. 신은 거룩한 조정에서 장구한 계획과 원대한 대책으로 국가를 보전할 것을 생각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길 바랍니다." 하였다.
재신과 추신들이 보두 비웃고 배척하여 드디어 회보하지 않았다.
지난 8년전 동북9성을 받으면서, 고려를 영원히 부모의 나라로 삼겠다던 맹세가 생각나는군요.
<우리들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를 하고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세공을 정성껏 닦고, 또 감히 기와와 작은 돌도 경계 위에 던지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나쁜 마음을 버리고 대대로 조공을 드릴 것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번토(蕃土)는 멸망하리라.>
여진족은 청나라를 기점으로 민족의 색깔을 잊어버리고 중화민족에 동화되어, 지금은 민족자체가 없어졌으니, 고려를 배반한
맹세는 기여코 이루어진 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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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3부에는 다시 고려안 척준경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3부
오랜만에 척준경 맹장열전 3부를 시작합니다.^^
여진과의 전쟁이 끝나고, 고려조정은 안정기로 들어섭니다.
척준경 같은 전쟁형 무장의 경우 평시에는 그 존재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죠. 이때 척준경의 무력을 원했던 이자겸에 의해 척준경은 권력쟁투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자겸은 인주이씨로 1108년 둘째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백작에 봉해지고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본시 인주이씨는 문종 때부터 외척으로써 힘이 막강했는데, 숙종에 의해 세력이 몰락했다가 다시 이자겸대에 이르러 외척으로 재등장하게 됩니다.
이자겸은 1122년 인종이 즉위하는데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서경유수(西京留守)에 봉해집니다. 게다가 셋째,넷째딸을 인종의 비로 삼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척준경은 여진전쟁이 종결된 직후에 이미 이자겸에게 포섭된것으로 보이는데, 1112년 8월에 전주목사 이여림(李汝霖)등 수십명을 반역자로 모략하는데 척준경이 가담하게 됩니다. 이자겸은 척준경을 확실하게 자기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척준경의 딸을 이자겸의 아들 이지원(李之元)에게 혼인시켜 서로 사돈관계를 맺기도 하였습니다.
척준경이 이자겸에게 의탁한 배경에는 여진전쟁에 공을 세웠던 많은 무장들이 전쟁종료후 숙청당하는 현실에서 척준경은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 기댄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여진전쟁을 총 지휘했던 총사 윤관장군도 수많은 조정신료들에게 탄핵을 받아 목숨이 위태롭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