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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속 6성의 위치 (복주 편)

 5. 복주(福州) → 현 함경남도 단천


고려사 지리지
○ 복주(福州).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고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나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독로궤(禿魯)라 칭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미쳐 옛 땅을 다시 찾고 신우(辛禑) 8년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삼았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이판령(伊板嶺)【주(州)의 동북(東北)에 있으니 즉 마천령(磨天嶺)이다.】 과 두을외령(豆乙外嶺)【주(州)의 남쪽에 있으니 즉 마운령(磨雲嶺)이다.】 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 단천군(端川郡)
지군사(知郡事)가 1인이니, 길주도 좌익 병마(吉州道左翼兵馬)를 겸한다.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는데, 별호(別號)를 두을외(豆乙外)라 하고, 또는 독로올(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九城)을 설치하여,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우왕(禑王) 8년 임술【홍무(洪武) 15년.】 단주 안무사(端州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 7년 무인에 지단주군사(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천군(端川郡) 
동쪽은 길성현(吉城縣) 경계까지 66리, 남쪽은 이성현(利城縣) 경계까지 37리, 서쪽은 이성현 경계까지 45리, 갑산부(甲山府) 경계까지 1백 86리, 북쪽은 야인지(野人地) 경계까지 1백 7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백 78리이다.
【건치연혁】 본시 오림금촌(吳林金村)으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축출하고 성을 쌓고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를 두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함몰되어 독노올(禿魯兀)이라 일컫던 것을 공민왕(恭愍王)이 수복하였고, 신우(辛禑) 때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지단주사(知端州事)로 고쳤고,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