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定州) → 현 함경남도 정평
고려사 지리지
○ 정주(定州). 옛 칭호(稱號)는 파지(巴只)【선위(宣威)라고도 하였음.】 로 정종(定宗) 7년에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로 삼고 관문(關門)을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 정평 도호부(定平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함길도 좌익 병마 단련사(咸吉道左翼兵馬團練使)를 겸한다.【대개 각 익(翼)의 2품(品)이면 모익 병마 절제사(某翼兵馬節制使)라고 일컫고, 3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사(某翼兵馬團練使)라고 하며, 4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 부사(某翼兵馬團練副使)라 하고, 5, 6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 판관(某翼兵馬團練判官)이라 한다.】
예전에는 파지(巴只)라고 일컬었다. 고려 정종(靖宗) 7년 신사【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원년.】에 비로소 성(城)·보(堡)를 쌓고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도호부로 고쳤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정평(定平)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정주목(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별호(別號)는 중산(中山)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장곡(長谷)이다. 고려 현종(顯宗) 3년 임자【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에 성(城)을 쌓고, 9년 무오【천희(天禧) 2년.】에 장주 방어사(長州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장주현(長州縣)으로 고쳐서 본부(本府)의 임내(任內)를 삼았고, 금상(今上) 4년 임인【명나라 영락(永樂) 20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30리, 남쪽으로는 영흥부(永興府) 경계까지 45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1백 25리, 북쪽으로는 함흥부(咸興府)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1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파지(巴只) 선위(宣威)라고도 불렀다. 라고 일컬었는데, 고려 성종 2년에 천정만호부(千丁萬戶府)를 두었다. 정종 7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고 관문(關門)을 설치하고는 정주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였는데, 고종 때에 원 나라에 함몰되었다. 공민왕 5년에, 군병을 보내어 이를 수복하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 13년에 평안도 정주(定州)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 6성이 길주 이남으로 추정되는 동북 12성 중에 제가 알고 있는 사서에 위치가 비정된 곳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문제가 되는 길주 이북에 관해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에
기록이 두리뭉실하고 미흡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