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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의 두만강 도하 가능성 (6)

 

고려 문종조 오랜 태평세월과 치세로 국력을 비축한 고려는 1056년, 1080년 병력 3만을 파견하여
갈라전으로 진군한 예가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갈라전 지역이 고려에 복속을 청하게 됩니다.
물론 직접 관리를 파견하거나 그렇진 못하고요. 주현의 이름을 내려주는 선이었지요.

고려 문종조 여진1개 부락의 규모(호수, 인구, 병력등) 추정 http://cafe.naver.com/booheong/79996
고려 문종조 3만명의 여진 정벌군 http://cafe.naver.com/booheong/71967

이러던 상태에서 1102년 소해리를 격파한 목종(穆宗) 영가(盈歌)는 완안부족의 족제인 사갈(斜葛)을 고려에 파견하여 소해리를 격파했다고 알려주면서 통교를 시작합니다. 
이 사갈이 갈라전을 통과하면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갈라전이 완안부로의 귀부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고려 임금은 문종의 아들인 숙종이었는데, 
숙종은 갈라전이 완안부로 넘어갈까 걱정하여, 이를 중지하는 책략을 쓰게 됩니다.


금사 고려전中

○ 소해리(蕭海里)를 쳐부순 뒤에는 알로한(斡魯罕)으로 하여금 고려(高麗)에 가서 승전을 통보하도록 하니, 고려(高麗)에서도 사신을 보내와 승전을 축하하였다. 얼마 안되어 또 사갈(斜葛)과 알로한(斡魯罕) 등으로 하여금 [고려(高麗)에] 가 빙문(聘問)하도록 하니 고려왕(高麗王)은, “사갈(斜葛)은 여직(女直)의 족제(族弟)이니 대우하는 예가 융숭하여야 한다.” 고 하며 큰 은반(銀盤) 한개를 주어 사례하였다. 그 뒤 갈라전(曷懶甸) 등 여러 부족(部族)들이 모두 [여직(女直)에] 귀부(歸附)하려고 하자 고려(高麗)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귀부(歸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갈라전(曷懶甸)이] 고려(高麗)에 가까워 불리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여 [여직(女直)에 귀부(歸附)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사갈(斜葛)이 고려(高麗)에 있고 또 갈라(曷懶)[전(甸)]에 왕래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자세히 안 까닭으로, 마침내 석적환(石適歡)으로 하여금 가서 갈라전(曷懶甸) 사람들을 귀부(歸附)하도록 하였다.


고려사절요 1102년 4월 기사中
○ 동여진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다.

고려사절요 1102년 11월 기사中
○ 동여진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은공(銀工)을 청하므로 윤허하였다.

고려사절요 1103년 7월 기사中
○ 동여진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다. 본국의 의사로 완안부(完顔部)에 살면서 병을 잘 고치는 이가 있었다. 그때 영가의 친척에 병든 이가 있었는데, 영가가 의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 사람의 병을 고치면 내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너를 본국으로 돌려 보내 주겠다." 하였다. 그 사람의 병이 과연 낫자, 영가는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그를 국경까지 보내 주었다. 의사가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여진의 흑수(黑水)에 사는 부족이 날로 강해지며, 군사가 더욱 날래고 사납습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니, 이때부터 내왕이 막히지 않았다.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하고 우리나라에 승전한 것을 알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축하하고, 영가는 그의 족제(族弟) 사갈(斜葛)을 보내어 답례하니, 왕은 그를 매우 후대하였다.

고려사절요 1103년 11월 기사中
○ 동여진의 태사 영가가 고세솔부(古洒率夫) 아로(阿老) 등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쳤다.


이렇듯 1102년부터 1103년까지 완안부와 통교한 고려 사이에 있는 갈라전은
두 세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1103년 10월 29일 영가가 죽자, 새롭게 완안부의 족장이 세습하고 있는 
생여진 절도사, 여진 관명으로는 자칭 태사직을 이어받은 오아속은 
드디어 본격적인 갈라전 영입 작전?에 뛰어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