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불타는 궁궐
○ 내시 박심조(朴深造)라는 자는 승중(昇中)의 아들이다. 궁중 뒷간으로 빠져나와 분뇨가 잔뜩 묻었다. 지름길로 이자겸의 집에 가서 궁중의 사정을 고하니, 이자겸이 의관을 주어 그를 위로하였다. 척준경이 소억을 보내어 이자겸에게 말하기를, “오늘 저물면 적이 밤을 타서 몰래 출동할 듯하니, 그들이 행동하기 전에 궁문에 불을 지르고 수색하여 체포함이 어떠하냐." 하자, 이자겸이 이지미를 시켜 평장사 이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궁궐이 서로 나란히 서 있어, 만일 불이 나면 불을 끄기 어려울 것이니 매우 옳지 않다." 하였다. 척준경은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소부감(少府監)에 있는 황회목(黃灰木)과 장작감(將作監)에 있는 서까래들을 가져다 동화문(東華門) 행랑에 쌓고 불을 지르니, 바람에 불길이 날리어 삽시간에 내침에까지 불이 타 들어가, 궁인들이 놀라서 숨었다.
○ 저녁이 되어 척준경과 이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춘덕문(春德門)에 이르니, 문을 지키던 내시 이숙신(李叔晨)이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하였다. 척준경이 좌액 문으로 들어가니, 금위 별장(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빼어 들고 쫓아오자, 척준경은 물러나 달아났다. 이작이 손으로 문을 닫으니, 척준경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죽이라." 하였다. 지추밀원사 김진(金縝)이 숙직소에 있다가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고지식하고 변통성이 없어 세력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이자겸, 척준경과 사이가 나쁘니, 나가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따르던 사람들을 시켜 문을 닫고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밤에 왕이 걸어서 산호정(山呼亭)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김인존(金仁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시종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측근의 신하 임경청(林景淸)의 무리 10여 명이 있었다. 왕은 해를 당할까 두려워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선위할 것을 청하니,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다. 이수(李壽)가 좌중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왕의 조서가 비록 있으나, 이공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으랴." 하니, 이자겸의 뜻이 드디어 꺾여 울면서 조서를 돌려 주며 아뢰기를, “신이 두 마음이 없사오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알아 주소서." 하였다.
○ 홍입공(洪立共)은 장군 유한경(劉漢卿)의 아래에 있는 중랑장이다. 이자겸이 한경을 궁중에 들여보내고, 곧 홍입공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척준경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척준경이 홍입공에게 군사 60여 명으로 섶을 지고 도성(都省) 남쪽 길에 이르게 하였는데 홍입공이 은밀히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너희가 모두 왕의 신하인데, 섶을 지고 궁궐을 불사르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지고 가던 나무를 내려 놓고 선교문(宣敎門) 구멍으로 들어가 왕을 바라보며 나열하여 절하니, 왕이 놀라서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였다. 입공이 앞에 나아가 경과를 아뢰자, 왕이 매우 기뻐하여 술과 음식을 주니, 이때부터 왕을 호위하며 떠나지 않았다.
5. 충신들의 죽음
○ 계해일 새벽에, 왕이 불길이 다가와 나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이자겸이 승선 김향(金珦)을 보내어 남궁으로 나오기를 청하여, 왕이 걸어서 경령전(景靈殿)에 이르러 내시 백사청(白思淸)에게 명해서 조종의 신주를 받들어 내제석원(內帝釋院) 마른 우물에 들여 놓고, 서화문(西華門)으로 나와 말을 타고 연덕궁에 이르니, 오탁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척준경이 낭장 장성(張成)을 시켜서 칼을 빼어 들고 돌진하여 오탁을 잡아 죽이고, 또 사람을 나누어 보내서 최탁, 권수, 고석ㆍ유한경, 송행충ㆍ이작ㆍ안보린 및 대장군 윤성(尹成)ㆍ한경(韓景), 장군 박영(朴英)ㆍ송인(宋仁)ㆍ사유정(史惟挺)ㆍ오정신(吳挺臣), 낭장 이유(李儒), 내시 최잠(崔箴), 원외랑 박원실(朴元實) 등을 붙잡아 죽였다. 홍관은 늙고 병들어 잘 걷지 못하여 맨 나중에 나와서 서화문(西華門) 밖에 이르렀는데, 척준경이 사람을 시켜서 죽였다. 그 밖에 죽은 군사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 내시 봉어(內侍奉御) 왕관(王觀), 대장군 윤선(尹先), 낭장 정총진(丁寵珍), 별장 장성호(張成好) 등이 왕을 모시고 남궁에 있었는데, 이자겸이 그들을 내보내기를 두세 번이나 청하니, 왕이 할 수 없이 따르며 사람을 시켜 죽이지는 말라고 청하였으나, 이지보(李之甫)가 모두 죽였다. 이자겸이 또 척준경과 함께 상의하여, 난이 일어나던 날에 숙직하던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죽이자 하니, 이수(李壽)가 굳게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 장군 이녹천(李祿千)ㆍ김단(金旦)ㆍ김언(金彦)은 도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날 궁궐이 다 타버리고 오직 산호(山呼)ㆍ상춘(賞春)ㆍ상화(賞花)의 세 정자와 내제석원(內帝釋院) 행랑 수십 칸만이 겨우 남았다. 모든 관원이 허둥지둥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직사관 김수자(金守雌)가 혼자서 국사를 지고 산호정 뒤에 가서 땅을 파고 묻었기 때문에 타 없어지지 않았다. 이지보가 지녹연을 순천관(順天館)에서 결박하고 참혹하게 고문하여 거의 죽게 된 것을 윤한을 시켜 압송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는데, 충주에 이르러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었으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을 윤한이 팔다리를 잘라 길가에 묻고 돌아왔다. 김찬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김찬과 지녹연의 처자들을 모두 적몰하여 지방 관청의 노비로 삼았다.
○ 오탁의 아들 오자승(吳子升)과 고석의 동생 고보준(高甫俊)이 북산(北山)에 숨었는데, 박영(朴永)을 시켜 뒤를 밟게 하였더니, 고보준 등이 높은 바위에 올라가 박영을 꾸짖기를, “이자겸 등이 은총을 도둑질하고 권세를 독점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이리와 호랑이보다 더 심하여, 장차 종묘 사직을 전복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모두 간사하게 아첨하여 그를 섬기니, 본래 노예만도 못하다. 우리는 의거를 일으켜 우리 백성에게 보답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운명이다. 의사가 어찌 너같이 못난 놈의 손에 죽을수 있겠느냐." 하고, 곧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며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 지녹연은 채문(蔡文)의 증손으로 재간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갑신년에 여진을 토벌하는 데 따라가 상당한 공이 있었다. 사람됨이 거칠고 방자하고 학술이 없으며, 스스로 지혜가 있는 줄로 생각하지만 계책이 졸렬하여 도리어 화를 당하였다. 홍관은 당성군(唐城郡) 사람으로, 힘써 공부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김진은 일찍이 영광ㆍ청주 두 고을을 다스려 모두 정사를 잘했다는 명성이 있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기는 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