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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속 6성의 위치 (길주 편)

 6. 길주(吉州) → 현 함경북도 길주


고려사 지리지
○ 길주(吉州). 오래 여진(女眞)의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궁한촌(弓漢村)이라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6년에 중성(中城)을 쌓았으나 이어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해양(海陽)이라고도 하였다 함.】 이라 칭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때에 옛 땅을 되찾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웅․길주 등처 관군민 만호부(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었다.【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난도(卵島)가 있다.

고려사 지리지 첨부中
또한 의주(宜州) 땅은 정주(定州) 남쪽에 있어 반드시 여진(女眞)을 쳐서 쫓은 뒤에 설치한 것이 아니어서 이후에 설치한 것이다. 꼭 이에 이르러 성곽을 새로 건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함께 9성(城)으로는 칭하였으나 철거한 수(數)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종실록 지리지
⊙ 길주목(吉州牧)
사(使)가 1인이니,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겸하게 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길주도 중익 병마(吉州道中翼兵馬)를 겸한다.
예전에는 삼해양(三海陽)이라 하였는데,【일명 해양(海洋)이라 한다.】 오랫동안 야인(野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 정해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이 군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장군(將軍)을 나누어 보내어서 지역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여, 동쪽으로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으로 궁한령(弓漢嶺)까지,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 나라의 강토(疆土)로 삼고, 화관산(火串山) 아래에 성곽(城郭) 9백 52간(間)을 쌓고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복주(福州)’라고 하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9백 52간을 쌓고 이름을 ‘영주(英州)’라 하고, 궁한촌(弓漢村)에 6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길주(吉州)’라고 하였는데, 길주가 북쪽에 있고, 웅주가 남쪽에 있다. 3년 무자 2월에 또 공험진(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李澤)으로써 함주 대도독부사(咸州大都督府使)를 삼아서, 비로소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의 4주(州)와 공험진(公險鎭)의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윤관(尹瓘)이 북계(北界)에 여러 성(城)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함주(咸州)를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戶)를 두고, 영주(英州)를 ‘안령군(安嶺軍)’이라 하고, 웅주(雄州)를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戶)를 두고, 길주(吉州)·복주(福州)·의주(宜州)의 3주(州)에는 각각 7천 호(戶)를 두었고, 공험진(公險鎭)·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 3진(鎭)에는 각각 5천 호(戶)를 두었다. 4년 기축에 동계(東界)의 숭령진(崇寧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의 3진(鎭)과 영주(英州)·복주(福州)의 두 주성(州城)을 철폐하고, 또 함주(咸州)·웅주(雄州) 2주(州)와 선화진(宣化鎭)의 성(城)을 철폐하였다. 6년 신묘에 중성(中城)을 주(州)에 쌓고, 산성(山城)을 공험진(公險鎭)에 쌓았다.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명나라 홍무(洪武) 23년.】에 웅주(雄州)·길주(吉州) 등처에 관군민 만호부(管軍民萬戶府)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쳤다.예전에는 주치(州治)가 서지위(西之委)에 있었으나, 지금은 부서평(夫瑞坪) 남쪽으로 옮겼는데, 구치(舊治)와의 거리가 40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길성현(吉城縣) 
동쪽은 명천현(明川縣)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명천현의 경계까지 32리, 남쪽은 바다까지 1백 27리, 서쪽은 단천군(端川郡) 경계까지 1백 19리, 서울까지는 1천 4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가,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군대 17만을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지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동쪽은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은 궁한령(弓漢嶺),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의 영토로 만들고, 궁한촌(弓漢村)에다 6백 70칸을 쌓고 길주(吉州)라고 이름 붙였다. 3년에 방어사(防禦使)을 두었고, 6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바로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와서 이 지역이 원(元) 나라에 편입되어 해양(海洋)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 삼해양이라고도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註)에, “해양(海洋)은 땅 이름인데, 지금은 길주(吉州)에 있다. 해양에서 북쪽으로 50리를 가면 태신(泰神)이요, 태신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면 적알발(的遏發)이다. 해양ㆍ태신ㆍ적알발의 3개소에는 모두 맹안(猛安)이 있는데, 속설에 이것을 3해양(三海洋)이라 한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수복되었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하고, 영주(英州) 및 선화(宣化) 등의 진(鎭)을 모두 이 주(州)에 예속시켰다. 우리 왕조 태조(太祖) 7년에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쳤다가, 세조(世祖) 13년에 이시애(李施愛)가 이 주(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예종(睿宗) 원년에 강등하여 현(縣)으로 만들어 현재의 명칭으로 고치고 주(州)의 북쪽인 영평(永平) 등의 지역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설치하였다.
【군명】 해양(海洋)ㆍ삼해양(三海洋) 양(陽)으로 쓰기도 한다. 궁한촌(弓漢村)ㆍ길주(吉州)ㆍ웅성(雄城).


참고로 1107년 당시 고려의 동북면 최북방은 정주였습니다. 의주는 정주 아래에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