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년 인종즉위후 단행된 조정인사에서 척준경은 종2품 참지정사 및 정3품 이부상서에 임명되어 탄탄대로를 걷게 됩니다.
인종 원년 1123년 12월 기사中
○ 김지화(金至和)를 판병부사에, 임유문(林有文)ㆍ최홍재(崔弘宰)를 문하시랑 평장사에, 김약온(金若溫)을 중서시랑 평장사에, 척준경(拓俊京)을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박승중(朴昇中)을 추밀원사에, 김인규(金仁揆)를 동지추밀원사에, 이자덕(李資德)을 추밀원부사에 임명하였다.
게다가 이자겸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또 다른 세력이던 최홍재를 1124년 2월에 숙청시키는데, 이때 또한 척준경은 깊숙히 관여하게 됩니다.
인종 2년 1124년 2월 기사中
○ 동지추밀원사 최홍재를 승주(昇州) 욕지도(褥地島)로 귀양보냈다. 최홍재는 무관 집안 출신으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잘하여 여러 번 종군하였다. 지위가 높아지자, 권세를 부리고 교만해졌다. 이때 이자겸은 교만하고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면서 스스로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음을 알고 항상 자기를 해치려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면서 홍재를 심히 의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무인으로 권인(權因)이란 자가 그 뜻을 알고 이자겸에게 말하기를, “홍재가 장군 정정숙(鄭旌淑)과 이신의(李神義)와 음모하여, 장차 영공에게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물으니, 척준경이 말하기를, “홍재는 사람됨이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그렇지 않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자겸이 비밀리 왕에게 아뢰어 최홍재를 귀양보내고, 또 정정숙과 이신의와 최홍재의 아들 최상(崔翔)ㆍ최온(崔溫)ㆍ최단(崔端)과 중 도휴(道休)와 최온의 장인 노영거(盧令琚)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그해 12월 조정개각에서 척준경은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승진임명됩니다.
인종 2년 1124년 12월 기사中
○ 임유문(林有文)을 치리공신 검교태보 수태위 판상서호부사(致理功臣檢校太保守太尉判尙書戶部事)에, 김약온(金若溫)을 검교사도 수사공 문하시랑 평장사에 임명하고, 척준경(拓俊京)을 개부의동삼사검교사도(開府儀同三司檢校司徒)수사공(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수(李壽)를 검교사도 수사공 참지정사에 임명하며, 박승중을 검교사공 정당문학 판한림원사에, 김인규(金仁揆)를 검교사공 이부상서 지문하성사에 임명하며, 이자덕(李資德)을 공부상서 지추밀원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뭐에 심기가 뒤틀어졌는지 그 다음해 4월에 돌연듯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선포합니다. 아무래도 뭔가 조정에 불만을 품은듯 합니다. 아무래도 조정 대신들은 무력에 의해 출세한 척준경을 은근히 무시했던 모양입니다.
인종은 척준경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버렸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급히 사신을 파견해 척준경을 달래줍니다. 훗날 이자겸이 제거되고 난후 조정에 의해 버림받았던 척준경을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복권시켰던 인종은 아마 척준경을 무척이나 신임하고 있었던듯 싶습니다. 비록 척준경이 난신 이자겸의 수하노릇을 하고 있지만 임금에 대한 충심만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한편으로는 척준경의 단순하고 격정적인 성격을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척준경은 인종의 달램에 다시 조정에 돌아온 그해 겨울 조정개각에서 다시금 정2품 문하시랑 평장사로 승진임명됩니다.
인종 3년 1125년 4월 기사中
○ 중서시랑 척준경이 스스로 벼슬을 사면하고 고향인 곡주(谷州)로 돌아가니, 왕이 이를 듣고 시랑(侍郞) 최식(崔湜), 봉어(奉御) 이후(李侯)를 보내어 우봉군(牛峯郡)까지 쫓아가 달래어 돌아오니, 얼마 안 되어 다시 복직하였다.
인종 3년 1125년 12월 기사中
○ 척준경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수(李壽)를 중서시랑 평장사에, 박승중ㆍ이자덕ㆍ김인규(金仁揆)를 모두 참지정사에, 허재(許載)를 지문하성사에, 이지미(李之美)를 지추밀원사에, 지녹연(智祿延)ㆍ김진(金縝)ㆍ김부일(金富佾)을 아울러 동지추밀원사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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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反逆)
해가 바뀌어 1126년이 되자 드디어 고려 조정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어납니다. 인종이 즉위한지 4년째에 들어서자, 왕권을 되찾기 위해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인종은 마음을 굳치게 됩니다. 인종은 내시지후 김찬(金粲)과 내시녹사 안보린(安甫麟)에게 명하여 이자겸을 제거할 사람들을 모으라고 명합니다.(참고로 몽고 침략 이전의 내시는 고자가 아닙니다.^^; 내시는 명문 가문의 자제들이 선호하는 하위관직이었습니다)
김찬과 안보린은 문신 평장사 이수(李壽)와 전평장사 김인존(金仁存/김연金緣)을 찾아가 왕명을 전하지만 경솔히 대사를 일으키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는 답변을 듣습니다. 이에 다시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는데, 지녹연은 무관출신으로 여진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군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는듯 합니다. 지녹연은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등을 불러 왕명을 전하고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뜻을 모읍니다. 이 군부의 인사들은 척준경과 동생 척준신(拓俊臣)을 굉장히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척준경이나 척준신은 정통 군부인사들은 아니었지요. 척준경은 숙종이 조카를 죽이고 등극했을때 숙종의 무뢰배로 군부에 들어왔으며, 여진전쟁을 통해 벼락출세한 경우고, 척준신은 척준경의 뒷배에 힘입어 하급 군인에서 초고속 승진하여 이때 병부상서(현 국방부장관급)에 임명되어 있었는데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고려사에도 "척준신이 본래 낮은 지위에서 병부상서로 뽑히어 윗자리에 있는 것을 평소부터 미워하였다"라고 적혀있지요.
거사일은 2월25일 달빛이 약할때로 정했습니다. 고려사 기록을 살펴보죠.
예종4년 1126년 2월 기사중
1. 거사발발
○ 그날 초저녁에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먼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 내시 척순(拓純)과 지후 김정분(金鼎芬), 녹사 전기상(田其上)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에 던졌다. 내직기두(內直旗頭) 학문(學文)이 성을 넘어 중랑장 지호(池顥)를 통해서 이자겸에게 고하니 이자겸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낭중 왕의(王毅)가 또 성을 넘어 달려와 그 자세한 소식을 알리니, 이자겸이 척준경과 여러 아들 이지미(李之美) 등과 함께 서로 돌아보고 떨며 두려워 재신ㆍ추신 및 백관들을 집으로 소집하였다.
2. 척준경의 역습
○ 이자겸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고 이지미를 시켜 갔다왔다 하며 의논하였으나, 모두 대답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척준경이, “일이 급박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하고, 시랑 최식(崔湜), 지후 이후진(李侯進), 녹사 윤한(尹翰) 등과 함께 수십 명을 거느리고 밤에 주작문(朱雀門)까지 갔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윤한을 시켜 성을 넘어 자물쇠를 부수고 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신봉문 밖에 이르러, 아우성을 치니 소리가 땅을 울렸다. 지녹연(智祿延)과 최탁(崔卓) 등은 밖에 군사가 많이 모였으리라 생각하고, 모두 두려워서 나오지 못하였다. 이자겸이 사람을 시켜 최탁, 오탁, 권수, 고석 등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처자와 노복들을 잡아 가두었다.
3. 궁성 포위전
○ 좌복야 홍관(洪灌)이 도성에서 숙직하다가 탄식하기를, “왕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인데, 내가 편히 있을수 있느냐." 하고, 임술일 새벽에 서화문(西華門)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려 하니, 지녹연이 밧줄로 그를 끌어올려 왕의 곁에 있게 되었다. 척준경이 척준신 등의 시체를 보고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李之甫)과 최식ㆍ이후진ㆍ김정황(金鼎黃)ㆍ조순거(曹舜擧)ㆍ윤한ㆍ문중경(文仲經) 등과 함께 군사를 소집하여 군기고에 들어가서 갑옷과 무기를 가지고 나아가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하였다. 이자겸의 아들인 중 의장(義莊)은 현화사에서 중 삼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 밖에 이르니, 궁중에 있는 사람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고, 다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자성(子城)의 문 위를 지켰다.
왕이 신봉문에 나와서 황산(黃傘)을 펼치니, 척준경의 군사가 바라보고 나열하여 절하고 환성을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무기를 지니고 여기에 왔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들으니, 적이 궁중에 들어와 있다 하기에 사직을 호위하려 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그런 일은 없으며, 짐도 아무 탈이 없으니, 너희는 갑옷을 벗고 해산하라." 하고, 드디어 내탕의 은폐(銀幣)를 줄에 달아 늘어뜨려 군졸에게 하사하고, 시어사 이중(李仲)과 기거사인 호종단(胡宗旦)을 시켜 군사들에게 널리 임금의 명령을 알려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게 하니, 척준경이 성이 나서 칼을 빼어 들고 이중 등을 쫓아 버리고 군사에게 명령하여 다시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게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니, 빗나가는 화살이 왕의 앞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의장(義莊)의 무리가 도끼로 신봉문 기둥을 찍는데 어떤 사람이 누 위에서 중을 쏘아 머리를 맞히니 즉사하였다.
이자겸이 합문지후 최학란(崔學鸞)과 도병마 녹사 소억(邵億)을 시켜 궁문에 이르러 아뢰기를, “궁중에서 난을 일으킨 자를 내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궁중이 경동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말씨가 매우 불손하여 왕이 아무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