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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속 6성의 위치 (영주 편)

 4. 영주(州) → 현 함경남도 북청


고려사 지리지
○ 영주(英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안령군(安嶺郡)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 구사(舊史)를 상고하면 9성(城)의 땅은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여 거주한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에게 명하여 군사 17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군사를 나누어 땅을 경략(經略)하니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러 이것을 우리 강역(疆域)으로 삼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곽(城廓) 990간(間)을 쌓아 이름을 영주(英州)라 하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간(間)을 쌓아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간(間)을 쌓아 이름을 복주(福州)라 하였다. 궁한촌(弓漢村)에 670간(間)을 쌓아 이름을 길주(吉州)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04년 5월19일 기사中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북청 도호부(北靑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함길도 우익 병마(咸吉道右翼兵馬)를 겸한다.
본래의 이름은 삼산(參散)이다.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어 왔는데,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城)을 설치하였으나, 그 이름은 미상(未詳)이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쌍성(雙城)의 옛 지경을 수복하고 안북 천호 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다가, 21년 임자에 북청주 만호부(北靑州萬戶府)로 고쳤다.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청주(靑州)로 고쳤다가, 태종(太宗) 16년 병신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니, 청주목(淸州牧)과 이름이 같은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