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함주(咸州) 대도독부(大都督府) → 현 함경남도 함흥
고려사 지리지
○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던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고 3년에 주(州)를 두어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고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였으며 큰 성(城)을 쌓고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948명을 옮겨 살게 하였다가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았겨 합란부(哈蘭府)라 칭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에 옛 땅을 다시 찾아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으나 이어 만호부(萬戶府)로 고치고 영(營)을 두어 강릉(江陵)․경상(慶尙)․전라(全羅) 등의 도(道)의 군마(軍馬)와 방수(防守)를 모았으며 18년에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함평(咸平)이라 하였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함관령(咸關嶺)【부(府)의 북쪽에 있다.】 과 대문령(大門嶺)【홍헌(洪獻)에 있다.】 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 함흥부(咸興府)
윤(尹)이 1인이니, 도관찰사(都觀察使)가 겸하고, 소윤(少尹)이 1인이니, 함흥도 중익 병마 단련 부사(咸興道中翼兵馬團練副使)를 겸한다.
고려 예종(睿宗) 3년 무자【송나라 대관(大觀) 2년.】 2월에 진동군 함주 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고 큰 성(城)을 쌓아서,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천 9백 48호를 이주시켜 이를 채웠다. 뒤에 그 땅이 모두 원(元)나라에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고 일컬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옛 강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고쳐 영(營)을 설치하고, 강릉(江陵)·경상(慶尙)·전라(全羅) 등의 도(道)에서 군마(軍馬)를 모아다가 방수(防守)하였으며, 18년 기유【명나라 태조(太祖)홍무(洪武) 2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켜, 별호를 함평(咸平)이라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6년 병신에 함흥부로 승격시켜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흥부(咸興府)
동쪽으로는 홍원현(洪原縣) 경계까지 70리, 남쪽으로는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27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경계까지 2백 80리, 북쪽으로는 삼수군(三水郡) 경계까지 2백 10리, 북청부(北靑府) 경계까지 1백 7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오랫동안 동여진(東女眞)에게 점거(占據)되었는데, 고려 예종 2년에 윤관 등에게 명하여 여진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3년에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일컫고 성을 쌓아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천 9백 48호를 옮겨 채웠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으로 돌려주었는데, 뒤에 원 나라에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 일컬어져 쌍성에 속해 있었다. 공민왕 5년에 우리 환조(桓祖)에게 명하여 쌍성을 격파하고 옛 강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고쳐 병영을 설치하고 강릉(江陵)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 등 각 도의 군마(軍馬)를 모아다가 변경을 지켰다. 18년에는 목(牧)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 태종 16년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켜 관찰사의 본영으로 삼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세조 13년에 부내(府內) 사람이 이시애의 사주(使嗾)에 따라 관찰사ㆍ수령 등을 살해하였으므로 성종 원년에 군(郡)으로 강등시키고 토관을 혁파하였다. 영흥부(永興府)로 옮겼던 관찰사의 본영을 금상전하 4년에 복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