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예종조 여진정벌 간략 상황요약 1부 http://cafe.naver.com/goryeosa/1062
1부 [길주는 9성 중 여진과의 최전방이었다] http://cafe.naver.com/goryeosa/1367
2부 [2천으로 6만을 막은 최전방 길주] http://cafe.naver.com/goryeosa/1370
3부 [공험진은 길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http://cafe.naver.com/goryeosa/1371
동북9성이 정녕 손바닥만 한가요? http://cafe.naver.com/goryeosa/1373
위치 비정은 비정일 뿐입니다. 합당하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나 동북9성 위치 비정은 말들이 많아 어렵기도 하고요.
허나 고려 말에 수복한 길주 이남에 관한 기록, 고려사와 조선초의 기록은 어느 정도 수용하고
조선초에 새롭게 획득한 길주 이북에 관한 기록은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의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길주가 (이동로의) 최전방이라고 현재로서는 생각이 들고요.
현재 동북9성에 대한 4대 학설 중 일제 초기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함흥평야설의 근본 원인이
4군 6진이후의 [동북9성에 관한 기록이 날조되었다]는 전제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일정 부분은 맞다고 봅니다.
길주 이북에 관한 기록은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어,
명과의 국경 확정 문제 및 선조와 관련된 회령 지역 등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나 날조라기보다는
고려와 조선이 한 번도 다스리지 못한 지역, (제가 생각하는) 길주 이북을 점령하면서
[이전에 윤관이 점령한 적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분명하지 않게 넘긴 대목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듯싶습니다.
잡설이 길었는데요, 요는 가려 쓸건 가려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의주(宜州) → 현 강원도 덕원
고려사 지리지
○ 의주(宜州).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21년에 이곳을 취하여 고쳐 정천군(井泉郡)이라 하고 고려(高麗) 초에 용주(湧州)라 칭하였으며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고 예종(睿宗) 3년에 책성(策城)하였다. 별호(別號)를 동모(東牟)【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하며 또 호(號)를 의춘(宜春) 또는 의성(宜城)이라 하였다. 요해처(要害處)로 철관(鐵關)이 있고 해도(海島)로 죽도(竹島)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 의천군(宜川郡)
지군사(知郡事)가 1인이니, 영흥도 좌익 병마(永興道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일명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정천군(井泉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용주(湧州)라고 일컬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의성(宜城), 또는 동모(東牟)라고 일컫는다. 속현(屬縣)이 1이니, 진명(鎭溟)이다. 혹은 원산현(圓山縣)이라 하고, 또는 수강(水江)이라 이름하는데,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진명 현령관(鎭溟縣令官)을 두었다가, 뒤에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7리요, 남쪽으로는 안변부(安邊府)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통부 관내 영풍현(永豐縣) 경계까지 30리이며 북쪽으로는 문천군(文川郡)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일명 오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정천군(井泉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용주(湧州)라 일컬었으며 성종(成宗) 14년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으며 예종 3년에 성을 쌓았다. 본조 태종 13년에 딴 곳의 예에 의하여 의천(宜川)이라 고쳤고, 세종 1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군(郡)으로 만든 지 27년 만에 목(穆)ㆍ익(翼)ㆍ도(度)ㆍ환(桓) 4대의 어향(御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