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 강종 1103년 기사中
穆宗末年,阿疏使達紀誘扇邊民,曷懶甸人執送之。
穆宗使石適歡撫納曷懶甸,未行,穆宗卒,至是遣焉。
先是,高麗通好,既而頗有隙,高麗使來請議事,使者至高麗,拒而不納。
五水之民附於高麗,執團練使十四人。
語在《高麗傳》中。
목종의 말년에, 아소(阿疏)가 달기(達紀)를 보내 변경 백성들을 속여 선동하였는데,
갈라전(曷懶甸) 사람이 잡아 보냈다.
목종이 석적환(石適歡)으로 하여금 갈라전을 어루만지고 거둬들이게 하려 하였는데, 시행치 못하다가,
목종이 졸(卒)하자, 이때에 이르러서야 보내었다.
이전에, 고려(高麗)와 통호(通好/친분을 맺음)하였는데, 이윽고 틈이 상당히 벌어져,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의논할 일이 있다고 청하자, 사자를 고려에 보내었는데, 거부하고 들이지 않았다.
오수(五水)의 백성이 고려에 붙자, 단련사(團練使/당관제중 절도사의 예하관명) 14인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고려전(高麗傳)》에 그 말이 전한다.
금사 고려전中
○ [석적환(石適歡)이] 떠나기 전에 목종(穆宗)이 몰(沒)하고 강종(康宗)이 왕위를 이은 뒤 다시 석적환(石適歡)을 파견하여 성현통문(星顯統門)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을리골령(乙離骨嶺)으로 가서 군사를 더 모집하여 활열수(活涅水)로 나아가 갈라전(曷懶甸)을 순행하여 배반한 7성(城)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고려(高麗)에서 사람이 와, “꼭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 고 통고하니. 갈라전(曷懶甸) 관속(官屬)인 사륵 상온(斜勒 詳穩)· 치자보 상온(治刺保 詳穩)등으로 하여금 [고려(高麗)로] 가도록 하자, 석적환(石適歡)도 배로(盃魯)로 하여금 [고려(高麗)에] 가도록 하였다. 고려(高麗)에서는 치자보(治刺保) 등은 잡아두고 배로(盃魯)는 돌려보내면서, “너와는 상대할 것이 없다.” 고 하였다. 이때 오수(五水)의 백성들이 모두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하고붙잡힌 단련사(團鍊使)가 14명이었다.
※ 1103년 11월 ~ 1104년 1월 간 완안부 오아속이 파견한 석적환의 이동로
지도출처 : 중국역사지도집(중국지도출판사 1986) 중 금대 지도
A. 길공구의 오수(五水) 추정
(지도가 선명하지 못하여 잔준수와 혼준수는 해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맞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혹시 선명한 지도나 명칭을 가지고 계신 분 중에 틀린 것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오수가 왜 중요한 지는 다음편에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현수(星顯水/星显水)
2. 갈라수(曷懶水)
3. 애야굴하(愛也窟河)
4. 통문수(統門水)
5. 잔준수(潺蠢水)
+ 혼준수(渾蠢水)
B. 갈라전 내의 하천
1. 을리골수(乙離骨水) : 현 길주 부근, (을리골령, 궁한령 남쪽)
→ 길공구는 동북9성 길주부근으로 추정
(근거 : 상단의 동북9성 길주 이남설 증빙 /사서에 기록된 동북9성(실상 12성) 중 6성 위치비정 등 링크참고,
중국역사지도집)
2. 삼잔수(三潺水) : 현 북청 부근
→ 길공구는 동북9성 영주부근으로 추정
(근거 : 상단의 동북9성 길주 이남설 증빙 /사서에 기록된 동북9성(실상 12성) 중 6성 위치비정 등 링크참고,
중국역사지도집)
3. 활치수(活襧水)/활열수(活涅水) : 현 홍원 부근
→ 길공구는 동북9성 웅주부근으로 추정
(근거 : 웅주의 근거는 상단의 동북9성 길주 이남설 증빙 /사서에 기록된 동북9성(실상 12성) 중 6성 위치비정 등
링크참고, 활열수의 근거는 바이두 백과사전)
4. 벽등수(闢登水) : 현 함흥~정주 부근 → 동북9성 함주
(근거 : 벽등수의 근거는 중국역사지도집)
C. 두만강의 명칭 시대별 변화
1. 요 : 타문(駝門)
2. 금, 원 : 통문수(統門水) + 애야굴하(愛也窟河)
3. 명 : 도문하(徒門河)
4. 청 : 강희제 토문(土門江), 건륭제 도문강(圖們江)
5. 조선 : 두만강(豆滿江)
→ 만주어 만(萬) : tumen[투먼]
→ 만주어 두만강 : tumen ula[투먼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