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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8)

 이날 거사실패로 숙청된 주요 인사들로는 군부에는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윤성, 한경, 윤선
장군 고석, 박영, 송인, 사유정, 오정신, 이녹천, 김단, 김언, 송행충, 유한경
중랑장 홍입공
낭장 이유, 정총진

별장 이작, 장성호 등이며,

 

조정인사로는

내시 왕관, 최잠, 김찬, 안보린
원외랑 박원실
좌복야 홍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시어사 이중
기거사인 호종단
지추밀원사 김진 등입니다.

 

특징적인 점은 조정인사에 고위관료는 거의 없었으며, 내시들이 난을 주도하였으며, 그날 궁성 숙직을 하던 조정 인사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즉 조정의 고위관료는 이자겸에게 이미 포섭된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군부인사로는 고려에 존재하는 16명의 상장군,대장군 중에 6명이 난에 가담하였으며, 장군도 10여명이나 관련된 점입니다. 그러나 군부의 장성 16명이 가담한 거사치고는 동원 병력이 적었으며, 이자겸 일파에 낭장급(現 영관급) 지휘자들이 가담한것으로 미루어 보아, 장성급들은 이자겸에게 반발하였으나, 중간 지휘자들은 이자겸 일파에 장악되거나 중립을 지킨것으로 보입니다. 이 실패한 거사로 자칫 고려는 사직의 문이 닫힐 뻔 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이자겸이 선위조서를 받아 들여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4부에서 계속-

 

 

4부

다음편은 5부에서 끝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후엔 예정대로 이의민과 이성계편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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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년 2월26일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몇일이 지나 3월이 되자 이자겸은 자기집 중흥택 서원(西院)에 인종을 감금시킵니다. 이때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자겸 부자의 오만불손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요. 임금의 호위무장들을 죽이려고 이자겸의 부하 낭장 이적선(李積善)이 다가오자, 호위무장들이 임금에게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 인종의 옷이 찢기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집안에 들어서자 이자겸이 나와 땅을 치고 통곡하며 말을 합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기도 합니다.

 

1126년 3월 기사中

이자겸 曰 "황후가 궁으로 들어갈 때는 태자가 탄생되기를 원하였고, 탄생하자 오래 사시기를 하늘에 기원하여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 천지 신명이 나의 지성을 알아주실 터인데, 도리어 오늘날 적신의 말을 믿으시고 골육을 해치고자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니, 왕의 얼굴이 붉어져 말이 없었다."

資謙,與其妻出拜,拍手,拊地大哭曰自皇后入宮,願生太子,及聖人誕生,祈天永命,無所不至,天地鬼神,鑑吾至誠,不圖今日,反信賊臣,欲害骨肉,王,羞赧無言

 

이자겸은 자신의 둘째 딸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을 황후, 외손자 인종을 태자로 칭하며, 인종을 위해 모든것을 다했는데, 어찌 나를 배신하였으냐며 인종을 질책합니다. 

 

간혹 황제, 황상, 황후, 태자, 성상, 폐하, 태후등의 단어에 예민한 분들이 계시지요. 당시의 국제 정세에는 왕과 황제는 결코 동격일수 없는 분명한 격이 있습니다. 왕이라 칭하는 것은 스스로 황제의 제후국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만 국제 관계에서 조공관계는 단순히 주종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요. 고려가 거란(요)나 여진(금)에 조공하기도 하였으며, 한족(송)에도 조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반면에 여진도 오랫동안 고려에 조공하기도 하였구요. 송도 마찬가지로 거란에 100년이나 조공하였으며, 여진에게 조공하기도 하였습니다. 힘이 약할때는 강성한 나라에 조공하면서 왕을 칭하다가, 힘이 강성해지면 황제를 칭하고 주변국에 조공을 요청하고 왕으로 책봉하는것은 일종의 국제 외교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고려는 몽고의 침입이전에는 황제국의 칭호를 쓴것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반박의 여지가 없지요.

 

각설하고, 하여튼 인종이 이자겸의 사저에 유폐되자,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자겸은 난발생시 죽은 척준신(拓俊臣), 척순(拓純), 김정분(金鼎芬), 전기상(田其上), 최영(崔英)등의 관직을 추증하고,

조정의 모든 대소서사를 직접 처결하게 됩니다.

 

인종은 유폐되어 있으면서도, 내의 군기소감 최사전(崔思全)을 불러 은밀히 이자겸을 도모할 방책을 세우게 합니다.

최사전은 척준경만 매수할수 있다면, 이자겸을 척결할수 있다고 간합니다.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이 사돈이며, 이번 난때 척준경의 아들과 동생이 죽었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며 걱정합니다. 점을 쳐보니 길조가 나오자, 최사전에게 일을 진행할것을 명합니다. 왕명을 받은 최사전이, 은밀히 척준경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효유하고 인종의 교서를 전합니다.

 

1126년 3월 기사中

“태조와 역대 왕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어 화복이 두려운데, 이자겸이 특히 궁중의 세도를 믿을 뿐이오. 신의가 없으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은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한 세대에까지 없어지지 않을 공을 세우도록 하시오." 하니, 척준경이 속으로 옳게 여겼다.

 

 “생각하건대, 짐이 밝지 못해서 이번에 흉도들이 일을 일으키게 만들어 대신에게 근심과 수고를 끼치게 하였으니, 모두 과인의 죄이다. 이로써 몸소 반성하고 허물을 뉘우치며 하늘을 우러러 마음에 맹세하고, 신민과 더불어 그 덕을 새롭게 할 것을 바라노니, 경은 다시 노력하여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보필하여 뒤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하라." 하였다.

 

한편 1126년 3월 혼란스러운 내정에도 긴급히 처리해야할 국제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금나라에 대한 조공문제입니다.

금나라는 고려가 처리할수 없을만큼 강성해져, 더이상은 금나라의 압박을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원문을 살펴보죠.

 

1126년 3월 기사中

ㅇ 백관을 소집하여 대금(大金)에 대해 신하로서 섬기는 문제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모두 옳지 않다고 하였다. 오직 이자겸ㆍ척준경이 말하기를, “금 나라가 옛날에는 작은 나라로 요 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갑자기 중흥하여 이미 요와 송을 멸하였고, 정치를 잘하고 군사가 강하여 날로 강대해지고 있으며, 또 우리나라와 국경이 연접해 있으니, 일의 형세상 섬기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먼저 보내어 빙문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좇았다.

ㅇ 이지미를 보내어 태묘에 고하고, 금 나라를 섬기는 문제의 가부에 대하여 점을 쳤다.

ㅇ 갑오일에 해의 빛깔이 핏빛 같았다. 

 

조정의 의견이 금나라를 섬기는 쪽으로 결정난 몇일후 해의 빛깔이 핏빛 같았다라는것은 태조임금님의 피눈물이였을까요?

또한 고려조의 특이한 점은 국가의 막중대사를 처리함에 있어 꼭 길흉의 점을 쳐본다는 점이지요.

당시 사천공봉(후삼국시대 최지몽이 역임)이라는 하늘의 길흉을 점치는 공식적인 관직도 있었으니,

중요한 의식이였음은 분명합니다.

 

조정의 의견이 결론이 나자 곧바로 금나라에 사신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