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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9성이 두만강일까? (2)

 동사강목 지리고中

성을 철수할 때에는 당연히 먼 땅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주가 맨 북쪽이기 때문에 먼저 철수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은 모두 길주이내 서남쪽의 땅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매양, “9성은 마땅히 두만강 안팎의 땅에 있다.”
하니, 이것은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의 공험진에 대한 설에 의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설대로 한다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는 1천 8백여 리나 멀다. 
대저 성읍(城邑)을 창건하는 목적은 변경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처럼 1천 8백 리나 먼 땅에다 9성을 설치하였다면 어떻게 능히 성원할 수가 있었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로 증거하면,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니 오연총(吳延寵)이 왕명을 받아 와서 구원하였다. 공험진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엄습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이 길주 서남쪽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에,
“여진이 개마산 동쪽에 모여사는데, 지방이 3백 리로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을 끼고, 남쪽은 장주(長州)ㆍ정주(定州)에 접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이 또한 3백 리 안팎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종(睿宗)이 윤관에게 준 교서(敎書)에, 
“1백 리의 땅을 개척하여 9주(州)의 성을 쌓았다.”
하였으니, 만일 땅을 개척하여 두만강 북쪽 1천 8백 리나 먼 땅에 이르렀다면, 어찌 1백 리의 땅을 개척했다고 말하였겠는가?
공민왕 5년에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永興)이다. 을 격파하니, 조소생(趙小生)이 이판령(伊板嶺) 북쪽 입석(立石)의 땅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한다. 이판령은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지금의 단천(端川) 동쪽 66리, 길주(吉州) 서쪽 1백 30리에 있다. 으로 단주(端州)ㆍ길주(吉州) 사이에 있다. 여기에 말한 입석이란 필시 윤관이 세운 것이리라. 
공험진이 이미 길주의 서남쪽에 있으니, 그가 세운 비가 틀림없이 이 사이에 있을 것이다.


김정호의 대종지지 원본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대동지지(大東地志) 권(卷) 20 길주(吉州) 中
○公嶮鎭
麗史吳延寵傳女眞復圍吉州城幾滔王復遣延寵救之行至公嶮鎭賊遮路掩擊我師大敗散入諸城
據此則公峻鎭當在吉州界矣
一云今慶源府
一云在先春嶺東南白頭山東北
一云在松花江濱者皆誤也
其時尹瓘兵力僅及於鬼門關以南矣
先春嶺一云在豆滿江北七百里
尹瓘拓地至此城公嶮鎭遂立碑嶺上刻曰高麗之境
一云在慶源東北七百餘里有尹瓘定界碑二說俱誤
○공험진(公嶮鎭)
고려사(高麗史) 오연총(吳延寵) 전(傳)에 여진(女眞)이 다시 길주성(吉州城)을 포위(圍)하여 거의 넘치게 되자,
왕(王)이 다시 연총(延寵)을 보내 구원(救)하게 하였는데,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러서 적(賊)이 차로(遮路/길을 막음)하여 엄격(掩擊/습격)하니,
아사(我師/우리의 군대)가 대패(大敗)하여 제성(諸城)에 산입(散入/흩어져 들어감)하였다.
이에 근거(據)하면 곧 공험진(公嶮鎭/공준진公峻鎭은 영인 오류로 보임)은 당연히 길주(吉州)의 경계(界)에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 일컫기를 지금의 경원부(慶源府)라 하고, 
일부에서 일컫기를 선춘령(先春嶺) 동남(東南)과 백두산(白頭山) 동북(東北)에 있다고 하고,
일부에서 일컫기를 송화강(松花江) 물가에 있다고 하는 자가 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 당시 윤관(尹瓘)의 병력(兵力)은 겨우 귀문관(鬼門關) 이남(以南)에 미친 것이다.
선춘령(先春嶺)은 일부에서 일컫기를 두만강(豆滿江) 북(北) 700 리(里)에 있고,
윤관(尹瓘)의 탁지(拓地/개척한 땅)가 이 성(城)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영상(嶺上/재의 꼭대기)에 입비(立碑)하고 새기여 말하길 고려지경(高麗之境/고려의 국경)이라 하였다 한다.
일부에서 일컫기를 경원(慶源) 동북(東北) 700여 리(里)에 윤관(尹瓘)의 정계비(定界碑/경계를 정한 비)가 있다고 하나
두 설(說) 또한 모두 잘못된 것이다.

○按睿宗時用兵不出乎端吉二州而高麗女眞界以都連浦則自都連至鬼門關七百里摩天嶺五百里則定界之碑不出此二處矣
若以豆滿江北七百里爲是則公嶮先春俱在於寧古塔以北應不必如是矣
當作都連浦北七百里爲是 
○생각해 보면 예종(睿宗) 당시 (고려의) 용병(用兵)은 단길(端吉/단천과 길주) 두 주(州)에서 불출(不出/나가지 않음)하였고 
그리고 고려(高麗)와 여진(女眞)의 경계(界)는 도련포(都連浦/정주 인근)로써, 
곧 도련(都連)에서부터 700 리(里)인 귀문관(鬼門關)과 500 리(里)인 마천령(摩天嶺)에 이르렀으며, 
곧 정계(定界)의 비(碑)가 이 두 곳을 불출(不出/나가지 않음)한 것이다.
만약 두만강(豆滿江) 북(北) 700 리(里)리가 옳다고 한다면, 
곧 공험(公嶮) 과 선춘(先春) 모두 영고탑(寧古塔) 이북(以北)에 있어야 하는데 응당 반드시 이와 같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도련포(都連浦) 북(北) 700 리(里)를 옳다고 하여야 한다.


한줄요약하시는 짝다리 동관님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