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동북9성 현재까지의 저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명으로는 길주 이남이 유력하고요,
영주척벽기 300리를 따져서 길주를 현 길주냐? 아니면 다른 곳이냐를 따지게 되면
단천 전후의 마운령, 마천령 이남설도 타당성이 있고요.
예종의 교지인 100리와 동국여지승람의 노정표를 따지게 되면
홍원이남설도 눈여겨 보아야 하고요.
금사로 눈을 돌려보면, 갈라전, 합라로 총관부의 위치가 상경에서 1800리, 고려 정주에서 500리
이것을 조선식 리단위로 마천령으로 보아 단천 이남.
금사의 합라로 총관부의 위치가 현 길주로 보면 다시 현 길주이남설
금사의 궁한리나 을라골령을 추정하면 다시 현 길주이남설
조선 태종조 기록을 살펴보면 공험진 경원설.
조선 세종조 기록을 살펴보면 공험진 경원 내방소, 동북 700리 선춘령 외방소 설
현재 조선개국전에 수복한 지역만 살펴보았을 경우, 사서에서 정확히 비정한 곳은 총 6곳입니다.
학자들로 보면, 김정호 선생, 이병도 선생은 홍원이남설, 한치윤 선생은 단천이남설, 안정복 선생은 길주이남설 마운령 이남, 즉 이원이남설도 요즘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고요.
신숙주는 경원이남. 이익 선생은 길주이남설+초기에 경원에 땅찍고 공험진
만주원류고를 번역하신 [봉오선생]님은 역시 홍원이남설
역개루 카페의 라이트온님은 송용덕 박사의 의견인 마운령 이남, 즉 이원이남설을 지지하시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현 길주이남설에 무게를 두고 있고요.
금사를 접하다 보니, 이익 선생의 공험진 땅찍고 돌아온 설도 혹시나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단 우리 사서만 접하면 반쪽 짜리라 금사 등도 지금 보고 정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익 선생의 땅찍고~설이 가능하다면, 제가 쓸려고 하는 "공험진 이동설"이 성립 가능하다면
고려가 주력으로 차지한 곳은 길주이남, 단지 군사행동적인 면에서는 두만강까지 활동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험진은 축성 기록은 있는데, 폐성, 반환 기록은 없고,
최북단 이란 경계비 내용과 길주 이남이라는 상반적인 기록이 동시에 존재하며
9성 반환 후 다시 축성까지 하는 이상한 기록을 가진 진이기 때문이죠.
만약 공험진이 금사에 나온 여진에 함락당한 3성에 들어간다면, 공험진은 시기에 따라 한 곳의 명칭이 아니라
최북단, 다시 길주 이남, 다시 고려 내지 등으로 이름을 바꿔 새롭게 진을 구성했다고도 볼 수 있을듯싶습니다.
일단 여러 글을 정리 종합하여 집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