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전투에서 단신으로 도주한 왕건은 절치부심하여 10개월 만에 복수전을 감행합니다.
이름하여 삼년산성 전투!
이 전투에 관한 좋은 논문이 있어 소개를 해드릴까 합니다.
논문 <고려 태조 왕건의 삼년산성전투, 그 배경과 전개과정 검토>2020년 김명진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476176
고려사 927년 9월 기사中
견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해 다급한 지경에 이르자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고
전군이 패배했으며 왕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고려사절요 927년 9월 기사中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공산전투 전개과정 가설 : https://cafe.naver.com/booheong/42640
---------------------------------------------------------------------------------
927년 9월 왕건은 경북을 침공하고 신라 수도 경주를 숙대밭으로 만든 백제군을 응징하기 위해
정예기병 5천을 대동하고 공산에서 백제군과 격돌하였으나 전군이 패전하게 됩니다.
고려군이 갈아 넣은 정예 기병 5천...
당시 지방 각지에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호족들이 상존하던 때에
고려 왕조 자체 힘의 기반인 중앙군 기병 5천의 손실은.....
하여튼 절치부심한 왕건은 928년 7월 농번기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친정을 감행합니다.
고려사 928년 7월 13일 기사中
<가을 7월 병진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청주(靑州)로 갔다.>
928년 7월 병진일은 928년 7월 13일이며 양력으로는 928년 8월 1일입니다.
위 논문은 왕건이 출병할 여건이 좋은 농한기를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출병한 이유에 대해서
<절실함>을 들고 있습니다.
왜 삼년산성인가
☞ 당시 후백제의 전방 라인은 매곡성-일모산성-삼년산성
☞ 삼년산성은 경북으로 출병하는 백제군의 이동로
삼년산성 전개과정 추정 사료는 무엇인가?
☞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中
<마현박석(馬峴薄石)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얇은 돌이 3, 4리에 깔려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로는
“고려 태조가 일찍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적에 닦은 어로(御路)다.” 한다.
오정산성(烏頂山城) 고을 동쪽 5리에 있으니, 바로 삼년산성(三年山城)인데, 쌓은지 3년만에 완성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6백 99척이요, 높이가 18척이며, 성안에 우물 다섯 개가 있는데, 지금은 반은 무너졌다.
고려 태조 11년에 몸소 이 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청주(淸州)로 거둥했었는데, 산 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태조가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라.” 한다.>
유금필 열전 中
<1년에 왕의 명령으로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았다. 당시 백제의 장군 김훤(金萱), 애식(哀式), 한장(漢丈) 등이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靑州)를 침범하였다. 하루는 유검필이 탕정군 남산(南山)에 올라가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어떤 큰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터이니 빨리 가라"고 하였다. 유검필은 놀라 깬 후 그 길로 청주로 가서 적군과 싸워 격파하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하였는데 살상 포로가 3백여 명이었다. 중원부(中原府)에 달려가서 태조를 보고 전투 정형을 자세히 보고하였더니 태조가 말하기를
"동수 싸움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였더니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이 저으기 안심되었다."라고 하였다.>
위 논문은 마현박석, 군장동을 가지고 이 전투과정을 추론하였습니다.
말티고개(마현박석) : 태조가 고개 위 말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개 위 3~4리에 박석을 깖
군장동 : 삼년산성 아래에 있으며 태조가 군사를 주둔시킨 곳
3천이라는 숫자 : 논문 저자는 공산전투, 운주전투의 고려 동원 기병,
또한 삼년산성 전투 후 추격온 백제군 3천을 고려하여 추정
논문에는 말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비가 많이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투가 1~2일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설명되었는데
근거는 당시 삼년산성 인근이 모두 후백제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론
-공산 전투 패전 이후 첫 친정을 감행한 왕건은 백제군의 경북 침공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기병 3천으로
삼년산성을 1~2일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퇴각하였고
퇴각하는 왕건군을 백제군이 출성하여 청주까지 추격하였으나 구원온 유금필에 의해 격퇴됨
-복수 실패! 유금필 존재가치↑↑
-이후 왕건의 시련은 계속됨 (강주를 잃고 대야성도 잃고 나주도 잃게 됨)
-반전은 1년 5개월 후 안동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