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와 신원사는 청나라 멸망 후 편찬된 사서입니다.
청사고는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의 명으로 1914년~1927년간
한족 팔기 정람기 출신이며 청 사천총독의 관직을 역임했던 조이손이 수장이 되어 편찬하였습니다.
신원사는 역시 위안스카이의 명으로 1914년~1920년간
한족으로 청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 서길사를 역임한 가소민이 수장이 되어 편찬하였습니다.
가소민은 조이손 사후 청사고 편찬의 마무리를 관장하기도 하였지요.
헌데 청사고와 신원사를 살펴보면 사관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청나라 유신이라 생각한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멸만흥한이라 하여 만주족이 숨도 못 쉬던 시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족 출신 구 청나라 관리들이 여전히 자신들을 청나라의 녹을 받았던 신하로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조이손은 청사고를 편찬하다 사망하였고, 가소민은 청 멸망후 관직을 마다하고 신원사 편찬이후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신원사 본기 서기 찬평 中
史臣曰:
「元人數典忘祖,稱其國姓曰奇渥溫氏,而舊史因之。
我高宗純皇帝旣命館臣改譯,
사신은 말한다!
「원나라 사람은 조상의 근본을 망각하여 그 국성을 칭하여 말하길 기악온씨라 하였으니 이는 옛사서로 인함이다.
우리 고종(건륭제) 순황제가 이윽고 관신에게 명하여 다시 번역하게 하였고
청사고 태종 본기 찬평 中
論曰:太宗允文允武,內修政事,外勤討伐,用兵如神,所向有功。
雖大勛未集,而世祖即位期年,中外即歸於統一,蓋帝之詒謀遠矣。明政不綱,盜賊憑陵,帝固知明之可取,
然不欲亟戰以剿民命,七致書於明之將帥,屈意請和。明人不量強弱,自亡其國,無足論者。
然帝交鄰之道,實與湯事葛、文王事昆夷無以異。嗚呼,聖矣哉!
논하여 말한다!
태종은 문무에 뛰어났고 정사를 내수하였으며 외국을 부지런히 토벌하였는데 용병은 신과 같았고
향하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비록 대업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지 1년 만에 중외가 즉시 통일되었으니,
대개 황제가 남긴 계책이 원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명의 정치가 문란하고 도적이 창궐하니 황제가 명을 가히 취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알았고
지나치게 싸워 백성의 목숨을 끊지 않으려 하여, 일곱 번이나 명의 장수에게 서신을 보내 화친의 굳을 뜻을 보였다.
명나라 사람은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스스로 망국하였으니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교린의 도로써, 실로 탕왕이 갈을 섬기듯, 문왕이 곤이를 섬긴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호라 성군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