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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홍 타이지는 만문 조서를 보냈는가?

 병자호란 당시 홍 타이지와 인조 사이에 오간 문서의 내용은

만문과 한문 두가지 내용이 있어, 이미 일전의 연재에서 번역하여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만문노당 1636년 11월 25일~12월 30일 1부~65부

내국사원당 1637년 1월 1일~1월24일 1부~30부

내국사원당 1637년 1월 24일~2월 30일 연재 예정

청실록 1637년 1월 1일~7월 3일 1부~51부

만주어 삼전도비 번역


속잡록 1638년 7월 16일 기록에는 인조가 명 진도독에게 보내는 문서를 인용하며

인조가 진도독에게 남한산성의 일을 설명하며 국서 관련도 언급하였는데요.

이 기록에는 남한산성 포위 당시 용골대 등이 보낸 국서가 언문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즉 이 언문은 만주문으로 판단됩니다.

홍 타이지의 조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써서 인조에게 보낼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겠습니까?


속잡록4 무인년 1638년 7월 16일 인조가 진도독(陳都督)에게 보내는 자문(咨文)中

-7월 16일신시와 유시에 해무리가 지다. 21일 사시와 미시에도 햇무리가 지다.

○ 진도독(陳都督)에게 주상이 자문(咨文)을 다음과 같이 보냈다.


-1월 2일에 차인(差人) 용골대(龍骨大)가 성밑에 와서 언문으로 쓴 격문을 던져 보였는데, 거기에 쓰기를,

 “대청국(大淸國) 관온 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서로 유시하노라. 


-또 지난해 본국에서 변신(邊臣)들에게 유시한 문서 한 통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로 보이며 아울러 언문으로 써 왔는데,

 “나라 운수가 불행하여 졸지에 정묘(丁卯)의 변을 당하였다. 하는 수 없이 권도로 그들과 화친을 허락하였더니, 

 10년 동안에 계학(溪壑) 같은 욕심이 만족함이 없어 공갈이 날로 심하니, 이는 참으로 전고(前古)에 없는 수치다. 


-그 후 본월 17일에 용골대(龍骨大)가 또 와서 격문(檄文)을 언문으로 쓰여진 글로 가져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문책을 너무 엄하게 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리에 어긋날 것이니, 어찌 하늘에 괴이하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겠는가?

 짐은 정묘(丁卯) 맹약을 중하게 여기고 일찍이 그대 나라가 맹약을 배반하는 일로 여러 번 신칙하여 유시하였다. 



-正月初二日差人龍骨大到城下投示檄文諺寫, 大淸國寬德仁聖皇帝, 詔諭朝鮮國王, 

-又將先年本國誡諭邊臣文書, 一度倂投示諺寫, 邦運不幸, 卒値丁卯之變, 不得已權許羈縻, 而十年之間

-本月十七日龍骨大又來投檄文諺寫, 來書云,



인조는 시종일관 홍 타이지의 국서(칙서)를 격문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구범진 교수님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이란 책에서
병자호란 남한산성 당시 오간 국서는 모두 한문이었다고 쓰셨더군요.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中
-당시 청과 조선이 주고받은 문서들은 애초에 만문이 아닌 한문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만문 조서와 이를 번역한 한문 조사가 동시에 조선측에 전달되었거나
혹은 만문 조서만이 전달되었을 것 같은데 좀더 내국사원당을 번역해 보고 해당 내용이 나오는지 알아보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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