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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순장이 부끄러워? 부끄럽냐고?

 후금과 청의 초기 사료에는 순장하는 것을 당연히 아무 거리낌 없이 기록하였습니다.

게다가 한을 따라 순장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고 이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홍 타이지가 죽은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니루 장긴(니루 어전)인 돈달리와 안달리는 죽어서 홍 타이지의 곁을 지키겠다고 순장을 자처하였습니다.

홍 타이지의 죽음을 참지 못하고 따라 죽은 장수들!

여진족의 순장 문화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선대 금나라 이전 시절에도 순장문화는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노비를 산 채로 불태우는 여진족 순장 소반(燒飯)

홍 타이지는 병자호란 직후 조선 여자들을 괴롭히는 만주족 여자들에게 순장시켜 버리겠다는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질투심에 조선 여자를 고문하던 청나라 여자들

제가 일전에도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누르하치는 부친 탘시 사후 어릴 때 자신을 학대하던 계모 나라 컨저도 죽였습니다. 이는 원초적 만문 사서인 현행전례(내국사원당)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사서에는 모두 삭제되어 있지요. 아마 제 추측으로는 아버지 탘시의 시신과 함께 순장을 강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일로 나라 컨저의 동생 삼잔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누르하치 사후 홍 타이지는 아버지의 유훈(내가 죽은 후를 기다려 반드시 순장하도록 하라!)을 들어 아바하이 및 후첩들인 아지건과 타인차 3인을 순장시킵니다.

또한 누르하치의 푸진이자 망굴타이의 모친 푸차 군다이도 첩 타인차의 고발(밤중에 2차례 군다이가 다이샨과 만났다)로 인해 이혼당하고 결국 망굴타이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요.

실상 당시 군다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들격인 다이샨과 부적절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고,

군다이가 다이샨 뿐만 아니라 홍 타이지에게도 똑같이 음식을 보내는 등 잘 보이려 한 정황이 있습니다.

이때 군다이가 다이샨을 만난 것은 누르하치가 자신의 사후 [자신의 부인들을 맏아들인 다이샨이 잘 보살피게 하리라!] 라고 말한 것을 군다이가 듣고 미리 다이샨에게 잘 보이려 한 것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즉 이는 아마 순장이라는 문화 때문에 누르하치 사후 자신이 순장당하지 않게 다이샨에게 미리 약을 친 게 아닐까 싶네요.^^;

군다이가 아들 다이샨에게 잘 보이려 치장한 이유는?

또한 누르하치는 생전에 홍 타이지의 모친 예허 몽고저저가 죽자, 몽고저저를 돌보던 여자종 4명을 함께 순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희~건륭조에 편찬된 청실록(고황제실록)에는 이를 모조리 삭제해 버립니다.

무황제실록 中

태조가 사랑하여 시신을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어 4명의 여자종을 순장하였고 각각 소와 말 100마리를 잡아 제사 지냈으며 한 달 남짓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하게 하여 밤낮으로 사모하여 슬퍼하여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며 장차 황후의 시신을 정원 안에 안치하였는데, 3년 후에야 냐만(념목)산에 매장하였다.

이를 고황제실록에는 이렇게 삭제하고 기록하였습니다.

고황제실록 中

붕함에 이르러 상의 슬픔이 심하여 상여를 염하고 제향하였으며 의물은 남김없이 가례하였고, 음주하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한달이 넘어갔고, 3년이 지나 비로소 냐만(니아만)산 언덕에 매장하였다.

여진족 : 순장 문화는 좋은 것이여!!!

건륭제 : 순장 같은 건 모조리 삭제하라!

P.S) 누르하치와 홍 타이지 시기 만주족은 순장문화를 당연시 여겼는데, 한이 죽을 시에 꼭 순장하는 남녀 말고도 모든 황족과 니루 어전 이상의 관리와 부인들도 또한 머리털을 잘라 순장의 뜻을 표합니다. 이를 절발(截髮)이라고 합니다.

승정원일기 1734년 9월 11일 기사中

김약로가 아뢰기를,

“순장은 오랑캐의 풍속이니 말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어진 사람을 잡아다 순장을 하는 데야 어떠하겠습니까. 훌륭한 법제를 자손에게 물려주더라도 오히려 무너질까 걱정스러운데, 하물며 포학한 방법으로 자손을 편안케 할 생각을 하였으니 비록 망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이 같은 대목에서 진념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