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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1의 게시물 표시

양주대학살 10부-함락3일차 학살에 울부짖는 아이들과 울지 않는 젖먹이

  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2부-도도<반항하는  양주성을 도륙 냈나이다!> 3부-함락 하루 전...잔치를 벌이다 4부-함락1일차(1) 낙성임박! 이중인격자 사가법! 5부-함락1일차(2) 아내에게 자살을 권유하다! 6부-함락1일차(3) 살육의 밤 공포에 떨다! 7부-함락2일차(1) 젖먹이들이 길가에 간과 뇌를 흩뿌리다! 8부-함락2일차(2) 고려여자들은 절개를 지켰는데, 너희 중국인은 수치를 모르는가? 9부-함락2일차(3) 구사일생 처자와 상봉하다!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中 【四月廿七日】 廿七日,問婦避所,引予委曲至一柩後,古瓦荒磚,久絕人跡, 予蹲腐草中,置彭兒於柩上,覆以葦席,婦僂居於前,我曲附於後。 揚首則露頂,展足則踵見,屏氣滅息,拘手足為一裹,魂少定而殺聲逼至,刀環響處,愴呼亂起,齊聲乞命者或數十人或百餘人。 遇一卒至,南人不論多寡,皆垂首匐伏,引頸受刃,無一敢逃者。 至於紛紛子女,百口交啼,哀鳴動地,更無論矣! 日向午,殺掠愈甚,積屍愈多,耳所難聞,目不忍視,婦乃悔疇昔之夜,誤予言未死也。 然幸獲至夕,予等逡巡走出,彭兒酣臥柩上,自朝至暮,不啼不言,亦不欲食,或渴欲飲,取片瓦掬溝水潤之,稍驚則仍睡去, 至是呼之醒,抱與俱去。 洪嫗亦至,知吾嫂又被劫去,吾侄在襁褓竟失所在,嗚呼痛哉! 甫三日而兄嫂弟侄已亡其四,煢煢孑遺者,予伯兄及予婦子四人耳! 相與覓臼中餘米,不得,遂與伯兄枕股忍飢達旦。 是夜予婦覓死幾斃,賴洪嫗救得免。 【4월 27일 】 27일에 부(婦)에게 피소(避所)를 문(問)하니, 위곡(委曲/구불구불한 길)으로 인여(引予)하여  일구(一柩)의 후...

홍 타이지가 살아 있었다면 양주 대학살은?

  병자호란 당시 홍 타이지가 청군에 내린 군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항하는 모든 자를 죽여라! -저항하지 않은 자는 죽이지 마라! -항복한 성은 약탈하지 마라! -항복한 조선 백성은 모두 머리를 밀게 하라! - 먼저 투항하여 온 자는 사랑으로 돌봐라! - 전투를 벌여 포로로 잡은 관리와 군사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 싸워서 얻은 성, 보, 마을의 백성은 죽이려면 죽이고 포로로 잡으려면 잡아라! 공포와 회유, 이게 그 당시 청군의 기본 전략이었습니다. 항복하면 그대로 살게 하고, 저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는 살인면허를 발급한 것이지요. 함락한 성의 관리는 1명도 살리지 말고, 한족은 포로로 잡든 죽이든 알아서 하라! 청이 입관 당시로 돌아가 보죠. 청의 군권을 장악한 도르곤에게 산해관의 오삼계는 한 통의 서신을 보내 도움을 청합니다. 당시 이자성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와서 오삼계의 부친 오양을 인질로 삼고 협박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도르곤은 반신반의하며 총동원령을 내려 산해관으로 갑니다. 결국 오삼계는 도르곤에게 무릎을 꿇고 투항하였고 연합군은 그대로 이자성군을 밀어버립니다. 이자성은 급하게 북경을 털고 남하하기 시작했고, 도르곤은 (구) 명나라 관리들의 만세 소리를 들으며 황제의 수레를 타고 북경에 입성합니다. 자금성에 들어온 도르곤은 곧장 숭정제를 장사 지내고, 그 복수를 하겠노라 천명합니다. 당시 북경은 이미 피폐해져 털어먹기는커녕, 청 본국에서 물자를 실어 날라 한족을 구휼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지거는 북경 한족을 모두 도륙내고 심양으로 돌아가자 하였으나 도르곤은 오히려 심양에 있는 순치제에게 내탕금 1백만 냥을 내어달라 청하게 됩니다. 도르곤은 동생 도도를 총사령관 정국대장군으로, 형 아지거를 정원대장군으로 삼아 이자성, 남명을 토벌하게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청나라 군권을 도르곤, 도도, 아지거 3형제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한족에 대한 모든 처분권은 출병한 도도와 아지거의 마음대로였습니다. 아지거...

양주대학살 9부-함락2일차(3) 구사일생 처자와 상봉하다!

  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2부-도도<반항하는  양주성을 도륙 냈나이다!> 3부-함락 하루 전...잔치를 벌이다 4부-함락1일차(1) 낙성임박! 이중인격자 사가법! 5부-함락1일차(2) 아내에게 자살을 권유하다! 6부-함락1일차(3) 살육의 밤 공포에 떨다! 7부-함락2일차(1) 젖먹이들이 길가에 간과 뇌를 흩뿌리다! 8부-함락2일차(2) 고려여자들은 절개를 지켰는데, 너희 중국인은 수치를 모르는가?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中 凡可避處皆有人,必不肯容,由後至前,凡五進皆如是。 直至大門,已臨通衢,兵丁往來絡繹不絕,人以為危地而棄之。 予乃急入,得一榻,榻顛有仰頂,因緣柱登之,屈身向裏,喘息方定,忽聞隔牆吾弟哀號聲,又聞舉刀砍擊聲,凡三擊遂寂然。 少間復聞仲兄哀懇曰。 「吾有金在家地窖中,放我,當取獻。」 一擊復寂然。予此時神已離舍,心若焚膏,眼枯無淚,腸結欲斷,不復自主也。 旋有卒挾一婦人直入,欲宿此榻,婦不肯,強而後可,婦曰。 「此地近市,不可居。」 卒復攜之去,予幾不免焉。 室有仰屏,以席為之,不勝人,然緣之可以及梁,予以手兩扳樑上桁條而上,足托駝梁,下有席蔽, 中黑如漆,仍有兵至,以矛上搠,知是空虛,料無人在上,予始得竟日未遇兵。 然在下被刃者幾何人,街前每數騎過,必有數十男婦哀號隨其後。 是日雖不雨,亦無日色,不知旦暮。 至夕,軍騎稍疏,左右惟聞人聲悲泣,思吾弟兄已傷其半,伯兄亦未卜存亡, 予婦予子不知何處,欲蹤跡之,或得一見。且使知兄弟死所。 乃附梁徐下,躡足至前街,街中枕屍相藉,天暝莫辨為誰?俯屍遍呼,漠無應者。 遙見南首數火炬蜂擁而來,予急避之,循郭而走。 城下積屍如鱗,數蹶,聲與...

병자호란 청 태종 본군 회군로 9일차(2월10일) 숙천(운암)

  안녕하세 요. 길공구입니다. 일전에 병자호란 청 태종 본군의 진군로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오늘은 천연두(마마)를 피해 다른 부대보다 서둘러 회군한 청 태종의 회군로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일차(2월2일) 속계(월계) 2일차(2월3일) 양주 3일차(2월4일) 장단 4일차(2월5일) 평산 5일차(2월6일) 서흥 6일차(2월7일) 봉산 7일차(2월8일) 중화 8일차(2월9일) 평양(부산) <병자호란 진군로 추정> 병자호란 청 태종 진군로 연구 청 본군 압록강 도강후 19일차 진군로 추정 1부~19부 병자호란 조선의 첫 반격과 청 좌익군 진군로 1636년 12월 14일 청 팔기군 진군 현황과 남한산성 입성   출처 : 만주어 내국사원당 1637년  2월 10일 평양 북쪽 30리 도소모이(부산) 출발 → 순안   →   숙천   →  운암 약 120리(약48km)  행군 추정. 건넌 하천 9곳 추정. 넘은 산 7곳 추정. <화면을 클릭하시고 원본보기를 누르세요> 내국사원당 1637년 2월 10일 기사中 ineku tere yamji unam de deduhe. 이너쿠 터러 얌지 우남 더 더두허. 같은 그 밤 운암 에서 잤다.   -10부에서 계속-

양주대학살 8부-함락2일차(2) 고려여자들은 절개를 지켰는데, 너희 중국인은 수치를 모르는가?

  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2부-도도<반항하는  양주성을 도륙 냈나이다!> 3부-함락 하루 전...잔치를 벌이다 4부-함락1일차(1) 낙성임박! 이중인격자 사가법! 5부-함락1일차(2) 아내에게 자살을 권유하다! 6부-함락1일차(3) 살육의 밤 공포에 떨다! 7부-함락2일차(1) 젖먹이들이 길가에 간과 뇌를 흩뿌리다!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中 入門,已有一卒拘數美婦在內簡檢筐篚彩緞如山,見三卒至,大笑,即驅予輩數十人至後廳,留諸婦女置旁室; 中列二方幾,三衣匠一中年婦人製衣。 婦揚人,濃抹麗妝,鮮衣華飾,指揮言笑。 欣然有得色,每遇好物,即向卒乞取,曲盡媚態,不以為恥; 予恨不能奪卒之刀,斷此淫孽。 卒嘗謂人曰: 「我輩征高麗,擄婦女數萬人,無一失節者,何堂堂中國,無恥至此?」 嗚呼,此中國之所以亂也。 三卒隨令諸婦女盡解濕衣,自表至裏,自頂至踵,並令製衣婦人相修短,量寬窄,易以鮮新; 諸婦女因威逼不已,遂至裸體相向,隱私盡露,羞澀欲死之狀,難以言喻。 易衣畢,乃擁之飲酒,嘩笑不已; 一卒忽橫刀躍起向後疾呼曰: 「蠻子來,蠻子來!」 近前數人已被縛,吾伯兄在焉。 仲兄曰: 「勢已至此,夫復何言?」 急持予手前,予弟亦隨之,是時男子被執者共五十餘人,提刀一呼,魂魄已飛,無一人不至前者; 予隨仲兄出廳,見外面殺人,眾皆次第待命,予初念亦甘就縛,忽心動若有神助,潛身一遁,復至後廳,而五十餘人不知也。 廳後宅西房尚存諸老婦,不能躲避,由中堂穿至後室,中盡牧駝馬,復不能逾走; 心愈急,遂俯就駝馬腹下,歷數駝馬腹匍匐而出; 若驚駝馬,稍一舉足,即成泥矣。 又歷宅數層,皆無走路,惟旁有弄可通後門,而弄門已為卒加長錐釘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