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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을 농단한 진성여왕의 유모와 정부

  신라 51대 여왕인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鳧好夫人) 은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국정 문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여 저자에 부호부인의 남편이자 진성여왕의 정부인 김위홍, 부호부인 등  진성여왕이 총애하는 4, 5명이 국정을 농단하여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결국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비방문이 붙기도 하였습니다. 진성여왕은 김위홍을 잊지 못해 원당을 세우고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지요. 부호부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7674&cid=46620&categoryId=46620 삼국유사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 거타지(居陀知) 中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왕위에 오른 지 몇 해가 되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의 남편 위홍(魏弘) 잡간(匝干) 등 서너 명의 총애 받는 신하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려서  정치가 흔들렸다.  그러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陀羅尼)의 은어를 만들어서  글로 써 길 위에 던져놓았다. 왕과 권신들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왕거인(王居仁)의 짓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글을 지을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는 곧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이 시를 지어서 하늘에 호소하자, 하늘이 옥에 벼락을 내리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연나라 태자 단(丹)이 피눈물을 흘리자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고 추연(鄒衍)이 원한을 품자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다네. 지금 나는 길을 잃어 옛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었는데 하늘은 어찌하여 상서로움을 내리지 않으시는가. 다라니는 이러하다. “남무망국(南無亡國) 찰니나제(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파가(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풀이하였다.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한다.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말한다. 소판은 벼슬 이름이...
최근 글

공산전투 이후 절치부심 왕건의 복수(삼년산성)

  공산전투에서 단신으로 도주한 왕건은 절치부심하여 10개월 만에 복수전을 감행합니다. 이름하여 삼년산성 전투! ​ 이 전투에 관한 좋은 논문이 있어 소개를 해드릴까 합니다. ​ 논문 <고려 태조 왕건의 삼년산성전투, 그 배경과 전개과정 검토>2020년 김명진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476176 ​ 고려사 927년 9월 기사中 견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해 다급한 지경에 이르자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고 전군이 패배했으며 왕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 고려사절요 927년 9월 기사中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 공산전투 전개과정 가설 : https://cafe.naver.com/booheong/42640 팔공산의 왕건설화 지명과 공산전투의 지리학적 탐색 ​ --------------------------------------------------------------------------------- ​ 927년 9월 왕건은 경북을 침공하고 신라 수도 경주를 숙대밭으로 만든 백제군을 응징하기 위해 정예기병 5천을 대동하고 공산에서 백제군과 격돌하였으나 전군이 패전하게 됩니다. 고려군이 갈아 넣은 정예 기병 5천... 당시 지방 각지에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호족들이 상존하던 때에 고려 왕조 자체 힘의 기반인 중앙군 기병 5천의 손실은..... 하여튼 절치부심한 왕건은 928년 7월 농번기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친정을 감행합니다. ​ 고려사 928년 7월 13일 기사中 <가을 7월 병진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청주(靑州)로 갔다.> ​ 928년 7월 병진일은 928년 7월 13일이며 양력으로는 928년 8월 1일입니다. ...

견훤 상부(X) 상보(O)에 관한 짧은 글

  고려사 王以萱,十年之長,稱爲尙父 왕은 견훤이 10년 연장으로써 칭하여 상보(尙父)라 하였다. ​ 父 -아비 부 -자 보(≒甫, 남자에 대한 미칭) ​ 결론 1. 직역 : 상보(높이는 尙 남자에 대한 미칭 父 ) 2. 임금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각별한 신하에게 내리는 호칭 (예:강태공) 3. 아버지 부(父)하곤 관계가 없음 ​ -상식적으로 10살 많다고 아버지뻘이라고 하진 않잖아요 ^^; ​ 예외적인 금석문이 있긴 합니다. 고려사 열전에 상보로 기록된 최선필은 939년 금석문에 國父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국부라 읽어야 맞는듯싶습니다.

동북 9성이 정녕 그렇게 작은가

  요즘 제가 연재하고 있는 동북9성 길주이남설에 대해서 손바닥만 한 땅이라고 하시는 분이 계셔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위치가 정확히 나와 있는 곳은 4개성 정도 되는데, 그중 고려 관문 정주와 길주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고려사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더구나 개척한 땅이 너무 넓어서,  9성이 서로의 거리가 요원하고 , 골짜기와 동네가 깊고 멀어 적은 복병을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 여진 정벌 당시 고려 최전방 관문인 정주에서 길주까지 거리를 길공구가 대충 거리를 재보겠습니다. 출처 : 구글맵, 다음지도 약 200km인데요, 서울에서 전주까지 거리와 비슷하네요. 진짜 손바닥 만한가요?

이걸 보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걸 보면 저게 맞는 것 같고...

  요즘  동북9성 위치 비정 에 대해서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토대로 위치를 비정해 보니  길주이남설 이 타당하더라고요. 또 존경하는 안정복 선생도 길주 이남설을 주장하셨더군요. 헌데 길주가 그 길주냐? 라는 의문에 당연히 길주가 그 길주 아니겠냐? 라고 생각하였는데, 어~ 아닐수도 있게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해서 한치윤 선생의 해동역사를 자세히 읽어보고 또 위치를 비정하다 보니까 이것도 맞는 말 같아요. 한치윤 선생 은 영주 척벽기의 300리와 금사의 합라로총관부 이남 500리, 상경회령부에서 1800리 실제로 각 지역의 km를 측정해 보니까 얼추 맞는 겁니다 -0- 어 거리로 위치를 비정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또 들더군요. 해서  마천령 이남 , 즉  단천이남설 이 맞는 거예요. 한데, 헛소리로 치부했던 일제 초기에 주장되었던  함흥평야설 ....... 이게 일제가 처음 주장한 게 아니더라고요. 조선 팔도를 직접 걸어 다니며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선생 의 위치 비정이 또 있더라고요. 이것을 보니 다시 함흥평야설, 정확히는  홍원이남설 도 맞는 듯이 보여요. 함흥평야설에서 위치 비정한 산성들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는데, 김정호 선생의 홍원이남설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게다가  봉오선생  이란 분의 글을 어제 접하고 이것도 읽어보니  이분의 박학다식함이 엄청나더라고요. 항간에는 이분이 만주원류고를 번역하셔서, 일명 환빠? 유사학을 다루는 게 아니냐? 하던데 그분 카페에 가서 몇몇 글을 읽어보니 절대 유사학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글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분이 만주어와 고려 말 수복했던 지명의 발음 관계 등을 따지며 위치 비정한 것을 살펴보니 또  홍원이남설 도 일리가 있더란 말입니다. 이병도 씨도  함흥평야설 을 ...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13)

  인종은 척준경의 죄가 실린 모든 관부의 문서를 모두 태우게 하였으며,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자, 임금의 뜻을 어기는 자는 죄를 묻겠다고 하는 등 척준경을 복권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19년후, 인종은 승하하시기 직전에 척준경의 관직을 추복하였으며, 그 자손들까지도 벼슬을 줘, 끝내는 20여년전의 은혜를 되갚습니다. 얼마뒤 인종도 생을 마감하시게 됩니다. 1146년 2월 기사中 ㅇ 척준경(拓俊京)의 문하시랑 평장사의 관직을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지방의 한미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무뢰배 생활을 하다, 계림공의 눈에 띄어 계림공 사저에서 격구등으로 소일하던 척준경.  그의 인생은 계림공이 숙종으로 등극하면서 급변, 하찮은 말단 임시 공무원에서 전쟁영웅으로. 어제의 동지들이 하나둘씩, 패전의 책임을 물고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뿌리칠수 없는 유혹의 손길 권신 이자겸. 그리고 궁궐을 불태우는 반역의 장! 이어지는 임금님의 간절한 요청에 충정은 요동치고. 결단의 칼을 뽑아 권신을 제거하고는 끝내 토사구팽을 묵묵히 받아들인 그. 죽음을 두려워 않는 의리의 사나이이자, 충정의 장수였지만, 권세에 흔들렸던, 어찌보면 인간적이였던 일명 "소드 마스터 척"은 그렇게 천년전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사라져 갔습니다. -------------------------------------------------------------------------------------- 드디어 끝이 났군요. 워낙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인물이다 보니 굉장히 글이 길어졌습니다.   다음에는 되도록 간단히 열전을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12)

  금나라가 물러가자 송은 다시 금 내부 교란을 획책하고, 그와중에 고려에 이와같은 서신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수백만 군사 동원은 고사하고, 이런 일련의 행위는 금의 분노를 사게돼, 결국 몇달후 재침공을 받아 송나라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상황제 휘종, 황제 흠종등 황족 3000여명이 인질로 잡혀가게 되면서, 송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그후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이 양자강 이남으로 탈출해 남송을 세우게 되지요.   만약 송나라가 금나라에게 세금을 꼬박꼬박 바쳤다면 북송은 멸망하지 않았을까요? 고려가 금나라와 사이좋게 지낸것을 보면, 세금만 제때 내고 어설픈 계략만 부리지 않았다면 북송은 멸망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마지막으로 고려조정으로 돌아갑니다. 1127년이 되자 고려 조정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묘청과 인종의 만남이었습니다.   1127년 3월 기사中 ㅇ 서경의 요망한 중 묘청(妙淸)과 일자(日者/점쟁이) 백수한(白壽翰)이 왕을 달래어 상안전(常安殿)에 관정도량(灌頂道場)을 설치하였는데, 그 술법이 허황하여 알 수 없었다. ㅇ 왕이 왕비 및 두 공주와 함께 흥복사(興福寺)에 행차하였다가 재신과 추신 및 가까운 신하들과 누선을 대동강 중류에 띄우고 잔치하고 즐기었다. ㅇ 정당문학 김부일(金富佾)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을 강론하고, 또 승선 정항(鄭沆)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열명(說命)과 주관(周官)을 강하게 하였다. ㅇ 정지상에게 명하여 서경의 무일(無逸)을 강론하고, 또 시종과 서경 유신(儒臣) 25명에게 시를 짓게 하고 술과 음식을 내렸다.   위글을 읽어보면, 드디어 조정에 새로운 세력들이 나서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외부적으로는 송나라는 멸망 일보직전이었고, 이에 금나라에 대한 충성맹세를 통해 변방이 안정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오랜 골치였던 이자겸등 권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