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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2의 게시물 표시

국경 땅따먹기(2)

  조선초에 이 공험진이 다시 대두된 것은 분명히 명과의 국경분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서쪽 국경은 고려조부터 유지해오던 압록강 라인이 어느 정도 확정된 상태였고, 문제는 동북 국경이었지요. 당시 동북은 확실히 내 땅이라고 할만한 나라가 없는 무주공산?이었지요. 물론 여진족이 땅을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나라를 이루진 못하였고, 고려조 이성계가 함흥을 중심으로 동북면을 관장하면서  많은 여진족이 내투하였으며, 조선이 건국해서도 기미정책을 쓰면서 간접 지배를 하였지요. 국경분쟁 당시 때마침 회령의 맹가첩목아가 명의 회유를 거부하고 조선에 내투하였지요. 게다가 경흥은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땅이었습니다. 즉, 조선 입장에서는 국경을 두만강 라인과 경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원군이 공험진이어야만 했습니다. *경원(慶源)의 뜻 자체가 기쁨의 근원, 즉 조선왕조 선조의 근원이란 뜻으로 명칭 된 것이며,    경흥(慶興)은 기쁨이 흥한 곳, 즉 조선왕조의 선조들이 흥한 곳이란 뜻으로 명칭 된 것이고,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와 고조모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원래 있던 곳입니다.    즉 세종에게는 매우~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점이지요!!! 고려가 갈라전을 일시 점유한 기간은  1107년 12월14일 갈라전 진입부터  1109년 7월 철수까지 길어야 2년 반입니다. 고려가 경계비를 세웠다는 공험진도 점유기간이 1108년 2월 27일에서 길어야 1109년 5월까지 2년 3개월 남짓입니다. 하지만 국초 국경분쟁에 있어 조선에게 중요한 것은 명분이었습니다. 명분상 명나라가 원나라 땅 모두 내놔라 하면, 조선은 동북면을 통째로 내줘야 하겠지요. 하지만 명나라가 여진족 땅을 모두 직할령으로 반드시 지배하겠다는 의지는 이후를 살펴보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해서 조선이 동북쪽 국경 라인의 가이드 라인을 두만강 라인으로 확보하기 위...

국경 땅따먹기(1)

  이방원이 회령의 맹가첩목아 포함해서 경원이남을  고려조에 점령한 공험진 이남이라 하여 그 밑의 여진족 포함해서 모두 조선의 땅으로 인정해 달라고 명에게 표문을 올린 후, 영락제의 사신 파견과 맹가첩목아의 조선 귀화?로 동북쪽 국경은 두만강 라인을 확보하게 됩니다. 실상 완전히 두만강 라인을 조선의 국경으로 확보한 것은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이었지요. 공험진을 경원으로 해야  이성계 당시 맹가첩목아가 있던 회령과,  이성계의 조상들이 원 관리를 할 때 있던 경흥을  안전하게 획득할 명분이 생기는 셈이지요. 세종에게도 경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왕조의 발상지?이고 하여 6진을 개척하면서 회령, 경흥, 경원까지 완전하게 확보하게 됩니다. 국경 분쟁의 명분이 된 공험진은 여러 설이 있으나  제가 그간 살펴본 바로는 고려 예종조 여진정벌의 실질적인 최전방은 길주였습니다. ------------------------------------------- 당시 갈라전은 금사의 호구수나, 고려 문종조 여진정벌 당시의 부족 현황 및 호구수를 살펴보면  대략 2만호 가량입니다. 윤관이 초기에 갈라전으로 진군하면서 풀 베듯이 여진족을 죽이거나 몰아내면서 갈라전의 상당 부분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에 완안부는 부족 연합군을 편성해 반격하지요. 실상 이전까지 완안부가 직속으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1102년 소해리 토벌전에 들어서야 1천이 되었고, 요와의 개전 초기에 찰지수 전투에서 2700명, 출하점에서 1만(새벽 도달한 병력 3700명), 이후 호보답강에서 천조제의 친정군에 대항한 것이 2만이었습니다. 즉, 여진정벌전 당시의 완안부 직속병은 1~3천 정도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것이 고려에 반격하면서 모든 생여진 부족을 끌어들이지요. 초기에 완안부가 파견한 알새가 이끈 연합 부대가 10부대이며, 병력은 최대 2만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1109년 대고려 전쟁 말기에는 6만까지 동원해서 길주를 공격합니다. 당시...

고려의 치킨게임(2)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P.S) 여진 정벌군 17만이 동북 9성 전역에 동원된 것은 <1107년12월 ~ 1108년 3월> 까지이고      이후에 군정 6500호(5인기준 약 3만3천), 남계 백성 68000호(5인기준 약 34만) 정착시킴      길공구가 추정한 동북9성에 배치된 병력 현황은       관병 8100명 + 군인가족 2만5천명 + 백성 34만명      고려에서는 이 정도면 방어전으로 전환해도 될 것으로 판단하여      9성 축조후에 정벌군을 회군시킴(1108년 4월 윤관 개선)      그러나 여진의 반격으로 수천~수만 단위로 계속 9성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음.      금사로 추정하면 당시 고려가 동원한 최대 병력은 약 7만 가량.      당시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완안부가 동원 가능한 병력은 약 2만 정도였으나      1109년 5월 길주성 포위전 당시 여진의 병력은 6만으로 기록됨 고려 예종조 여진정벌 간략 상황요약 1부  http://cafe.naver.com/booheong/82074   *9성의 관병 및 백성수 추정 (1호 5인 기준) -  함주성  :  관병 약 2000  + 군인가족 약 9700명 + 백성 65000명 = 총합  약 76700 명 -  영주성  :  관병 약 1300  + 군인가족 약 6200명 + 백성 50000명 = 총합  약 57500 명 -  웅주성  :  관병 약 1500  + 군인가족 약 7200명 + 백성 50000명 = 총합  약 58700 명 - ...

고려의 치킨게임(1)

  누가 먼저 죽는지 볼까?   -------------------------------------------------------------- 고려의 1109년 상황 1. 전국의 병력 징발하여 동북9성에 꼬라박음 1월~4월 -예종 갈라전(현 함경도)의 항복한 여진추장들 접견 -계속 군대를 동북9성에 보냄 -동북9성 최북단 길주성 여진 대군에 포위당함 -동북9성 고려군 사상사 다수 발생하고 사기 저하됨 5월 -오연총에 대군을 주어 동북9성에 파견 -길주성으로 가던 도중 여진군의 기습을 당해 대패 2. 병력 징발에 대한 반발이 극심하고 기근+유행병 크리 5월 -전국에서 병력 징발에 대한 반발 심함 -기근, 유행병 발생 -백성들 원망이 매우 심함 고려사절요 1109년 5월 기사中 동계병마원수 윤관을 서북로에 보냈다. 군신을 선정전에 모아 여진에게 9성을 돌려 주는 일의 가부를 물었다.  이전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의 궁한리(弓漢里)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가 겨우 통하니,    만약 관성(關城)을 설치하여 작은 길을 막는다면 여진에 대한 근심이 영구히 끊어질 것이다."  고 하였더니, 그것을 빼앗아 놓고 본즉 수륙의 도로가 가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어 앞서 듣던 바와 아주 판이하였다.   여진은 이미 소굴을 잃자, 맹세코 보복하고자 먼 곳의 뭇 추장을 이끌고 해마다 와서 공격하는데    속임수와 장기를 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이 험하고 튼튼하여 쉽게 함락당하지는 않았으나, 싸우고 지키느라 우리 군사의 손실 역시 많았다.   더구나 개척한 땅이 너무 넓어서, 9성이 서로의 거리가 요원하고,   골짜기와 동네가 깊고 멀어 적은 복병을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국가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중외가 소요한데...

동북 6성에 속하는 성들 (+alpha)

  ※  정주(定州)   → 현 함경남도 정평 고려사 지리지 ○ 정주(定州). 옛 칭호(稱號)는 파지(巴只)【선위(宣威)라고도 하였음.】 로  정종(定宗) 7년에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 로 삼고 관문(關門)을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중산(中山) 이라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 정평 도호부(定平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함길도 좌익 병마 단련사(咸吉道左翼兵馬團練使)를 겸한다.【대개 각 익(翼)의 2품(品)이면 모익 병마 절제사(某翼兵馬節制使)라고 일컫고, 3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사(某翼兵馬團練使)라고 하며, 4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 부사(某翼兵馬團練副使)라 하고, 5, 6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 판관(某翼兵馬團練判官)이라 한다.】 예전에는 파지(巴只)라고 일컬었다.  고려 정종(靖宗) 7년  신사【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원년.】에 비로소 성(城)·보(堡)를 쌓고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도호부로 고쳤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정평(定平) 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정주목(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별호(別號)는 중산(中山) 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장곡(長谷)이다. 고려 현종(顯宗) 3년 임자【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에 성(城)을 쌓고, 9년 무오【천희(天禧) 2년.】에 장주 방어사(長州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장주현(長州縣)으로 고쳐서 본부(本府)의 임내(任內)를 삼았고, 금상(今上) 4년 임인【명나라 영락(永樂) 20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30리, 남쪽으로는 영흥부(永興府) 경계까지 45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영...

사서 속 6성의 위치 (길주 편)

  6.  길주(吉州)  → 현 함경북도 길주 고려사 지리지 ○ 길주(吉州). 오래 여진(女眞)의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궁한촌(弓漢村) 이라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6년에 중성(中城)을 쌓았으나  이어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 【해양(海陽)이라고도 하였다 함.】 이라 칭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때에 옛 땅을 되찾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웅․길주 등처 관군민 만호부(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었다 .【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난도(卵島)가 있다. 고려사 지리지 첨부中 또한 의주(宜州) 땅은 정주(定州) 남쪽에 있어 반드시 여진(女眞)을 쳐서 쫓은 뒤에 설치한 것이 아니어서 이후에 설치한 것이다. 꼭 이에 이르러 성곽을 새로 건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함께 9성(城)으로는 칭하였으나 철거한 수(數)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종실록 지리지 ⊙ 길주목(吉州牧) 사(使)가 1인이니,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겸하게 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길주도 중익 병마(吉州道中翼兵馬)를 겸한다. 예전에는 삼해양(三海陽)이라 하였는데,【일명  해양(海洋) 이라 한다.】 오랫동안 야인(野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 정해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이 군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장군(將軍)을 나누어 보내어서 지역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여, 동쪽으로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으로 궁한령(弓漢嶺)까지,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 나라의 강토(疆土)로 삼고, 화관산(火串山) 아래에 성곽(城郭) 9백 52간(間)을 쌓고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복주(福州)’라고...

사서 속 6성의 위치 (복주 편)

  5.  복주(福州)   → 현 함경남도 단천 고려사 지리지 ○ 복주(福州).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고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나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독로궤(禿魯)라 칭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미쳐 옛 땅을 다시 찾고 신우(辛禑) 8년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삼았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이판령(伊板嶺)【주(州)의 동북(東北)에 있으니 즉 마천령(磨天嶺)이다.】 과 두을외령(豆乙外嶺)【주(州)의 남쪽에 있으니 즉 마운령(磨雲嶺)이다.】 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 단천군(端川郡) 지군사(知郡事)가 1인이니, 길주도 좌익 병마(吉州道左翼兵馬)를 겸한다.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는데, 별호(別號)를 두을외(豆乙外)라 하고, 또는 독로올(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九城)을 설치하여,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우왕(禑王) 8년 임술【홍무(洪武) 15년.】 단주 안무사(端州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 7년 무인에 지단주군사(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천군(端川郡)  동쪽은 길성현(吉城縣) 경계까지 66리, 남쪽은 이성현(利城縣) 경계까지 37리, 서쪽은 이성현 경계까지 45리, 갑산부(甲山府) 경계까지 1백 86리, 북쪽은 야인지(野人地) 경계까지 1백 7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백 78리이다. 【건치연혁】  본시 오림금촌(吳林金村)으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축출하고 성을 쌓고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를 두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사서 속 6성의 위치 (영주 편)

  4. 영주( 英 州)   → 현 함경남도 북청 고려사 지리지 ○ 영주(英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안령군(安嶺郡)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 구사(舊史)를 상고하면 9성(城)의 땅은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여 거주한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에게 명하여 군사 17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군사를 나누어 땅을 경략(經略)하니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러  이것을 우리 강역(疆域)으로 삼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곽(城廓) 990간(間)을 쌓아 이름을 영주(英州) 라 하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간(間)을 쌓아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간(間)을 쌓아 이름을 복주(福州)라 하였다. 궁한촌(弓漢村)에 670간(間)을 쌓아 이름을 길주(吉州)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04년 5월19일 기사中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