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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여진이 점령한 3성은 어디? (4)

  3. 공험진은 길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동사강목 1109년 5월 기사中 ○ 여진이 오연총을 공험진에서 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자 윤관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오연총이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길주(吉州)를 구원하려고 가다가 공험진에 이르자 적이 길을 가로막고 기습하여 ,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고려사 1109년 5월 기사中 ○ 여진이  길주성을 포위 하였다. 성으로부터 10리 되는 곳에 작은 성을 쌓고 목책 여섯 군데를 세워 수개월 동안 몹시 급하게 성을 공격하여 성이 거의 함락될 뻔하였다. 병마부사 이관진 등이 군졸을 독려하여 하룻밤에 다시 내성을 쌓고 지키면서 싸웠으나, 싸움이 오래되고 힘이 지쳐서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오연총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하려 하니, 여진이 길을 막고 불의에 습격 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죽고 포로된 것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연총은 장계를 갖추고 죄 받기를 청하였다. 고려사 오연총 열전中 그 후 여진이 또다시 원근 부락들의 인원을 집합하여 몇 달 동안이나  길주를 포위 하고 성 바깥 십리에 작은 성을 쌓고 여섯 곳에 목책(柵)을 만들고 맹렬하게 성을 공격하므로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병마 부사 이관진(李冠珍) 등이 병사들을 격려하고 하룻밤 사이에 다시 겹성을 쌓아 일변 전투, 일변 방어에 힘썼으나 전투가 오래 계속되고 기세가 꺾이어 사상자가 많았다. 오연총이 이 소식을 듣고 분연히 출정하려 했으므로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오연총의 군대가 공험진에 이르렀을 때에 적들이 길을 막고 요격하므로 우리 군대가 대패를 당하고  장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여러 성으로 뿔뿔이 흩어져 들어갔으며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오연총은 전황 보고를 상세히 하고 자기의 죄과를 비판한 후 윤관과 함께 군대를 정비하고 재차 길주를 향하여 갈 때 때마침 적의 사신이 와서 강화를 청했으므로 ...

여진이 점령한 3성은 어디? (3)

  4. 고려의 최전방이 공험진인가? 길주인가? 고려사절요 1108년 2월 기사中 ○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여섯 성을 신축하였으므로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였다. 도령할 좌부승선 예부낭중 임언을 시켜 공을 칭송하는 기문을 지어 영주 남청(南廳)에 걸었다.  또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尹瓘,以平定女眞,新築六城,奉表稱賀,使都鈐轄,左副承宣,禮部郞中林彥,作記頌功,掛于英州南廳, 又立碑于公嶮鎭,以爲界至。 고려사 1108년 2월 기사中 무신일. 윤관(尹瓘)이, 여진 평정과 6성을 새로 축성한 데 대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또한 공험진(公嶮鎭)에 비석을 세워 국경으로 삼았다. 戊申 尹瓘以平定女眞, 新築六城, 奉表稱賀.  立碑于公嶮鎭, 以爲界至. → 고려사에는 동북9성 관련하여 이상한 기록이 둘 있습니다. 고려사 지리지中 ○ 공험진(公嶮鎭). 예종(睿宗) 3년에 성(城)을 쌓고 진(鎭)을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았고  6년에 산성(山城)을 쌓았다. ○ 길주(吉州). 오래 여진(女眞)의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궁한촌(弓漢村)이라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6년에 중성(中城)을 쌓았으나  이어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 예종 6년이면 1111년입니다. 여진 전쟁이 끝난지 2년이나 지난 후인데,      갑작스레 공험진에 산성을 축성하다니요??? → 길주 또한 1109년 7월부터 철수작전이 시작된 맨처음 지점입니다.      헌데 갑자기 6년에 중성을 쌓았다니요???

여진이 점령한 3성은 어디? (2)

  5. 고려 철수 작전에 공험진은 왜 빠졌는가? 고려사 1109년 7월 18일 기사中 최홍정 등은 그 이후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로부터 시작해 9성에 비축해 둔 전투 장비와 군량을 차례로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적인(狄人)이 기꺼이 자신들의 우마를 내어 우리 백성 가운데 그곳에 남겨진 남녀노소 백성들을 한 명도 해치지 않고 돌려보냈다. 고려사 1109년 7월 21일 기사中 ○ 영주(英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와 복주(福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진양진(眞陽鎭)에 축조했던 성을 철거했다. 고려사 1109년 7월 22일 기사中 ○ 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주군)와 웅주(雄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선화진(宣化鎭)에 축조했던 성을 철거했다. 고려사 지리지 中 ○ 통태진(通泰鎭). 예종(睿宗) 3년에 성(城)을 쌓고 진(鎭)을 두었으며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숭녕진(崇寧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진양진(眞陽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선화진(宣化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다시 찾아 길주(吉州)에 병합(倂合)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中 예종 4년에 여진(女眞)이 또한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였다. 이에 비로소 길주(吉州)로부터 점차로 9성(城)의 전쟁물자와 군량을 내지(內地)로 거두어 들이고 드디어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진(鎭) 및 영주(英州)․복주(福州) 두 주(州)의 성(城)을 철수하고 또 함주(咸州)․웅주(雄州) 두 주(州) 및 선화진성(宣化鎭城)을 철수하여 이를 돌려 주었다.  → 공험진 반환+폐성 기록 없습니다. 1109년 5월까진 공험진이 분명히 존재하였습니다...

여진이 점령한 3성은 어디? (1)

  6. 여진에게 함락당한 3성은 과연 어디인가? 금사 사묘아리 열전中 渾坦與石適歡合兵于徒門水,阿里首敗敵兵,取其二城。 혼탄(渾坦)과 더불어 석적환(石適歡)이 도문수( 徒門水)에서  합병(合兵/병을 합침)하였는데,  사묘아리( 斜卯阿里) 가 주장( 主將)이 되어  적병( 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하였다. → 금사에는 고려 2성을 함락하였다고 나옵니다.     이후 사묘아리가 추가로 1개성을 더 함락시킵니다. 금사 사묘아리 열전中 斡塞、烏睹本攻駝吉城,阿里鑿墉爲門,日已暮,不可入,以兵守之,旦日遂取其城。 烏睹本以被甲並乘馬賜之。 알새( 斡塞)와  오도본( 烏睹本)이  타길성( 駝吉城)을 공격( 攻擊 )하였는데,  사묘아리( 斜卯阿里) 가  착용( 鑿墉/벽을 뚫음)하여  문( 門)으로 하니, 날이 이미 저물어, 들어갈 수가 없자, 병(兵)으로써 지키게 하고는,  (다음날)  새벽녘에 드디어 그 성(城)을  취(取)하였다. 오도본( 烏睹本)이 피갑( 被甲/갑옷을 입힘)하고 겸하여 탈수 있는  말을 하사( 下賜) 하였다. 송사전 금열전에도 나옵니다. 송사전 금열전 ○ 금 강종(金康宗) 4년 병술 예종 원년 고려가 흑환방석(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왕위를 승습한 것을 축하하였다. 강종이 배노(盃魯)를 보내어 빙문하게 하고, 또 전에 약속한 대로 망명한 백성들을 돌려보내 주기를 요구하게 하였는데, 고려가 허락하면서 말하기를, “사신을 파견해서 국경까지 와서 데려가라.” 하였다. 강종이 이 말을 믿고 완안부(完顔部)의 아괄(阿聒)과 오림답부(烏林答部)의 승곤(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서 이를 데려오게 하고, 강종은 마기령(馬紀嶺)의 을척촌(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인도해 오기를 기다렸다. 아괄과 승곤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이들을 살해하고는 갈라전으로 군사를 출...

사서에 나온 거리를 어떻게 다루는가?

  길공구가 생각하는 정답이란? 맨 아래에 있습니다. 이거 맞을까요? ^^;;;

고려군의 두만강 도하 가능성 (7)

  금사 강종 1103년 기사中 穆宗末年,阿疏使達紀誘扇邊民,曷懶甸人執送之。 穆宗使石適歡撫納曷懶甸,未行,穆宗卒,至是遣焉。 先是,高麗通好,既而頗有隙,高麗使來請議事,使者至高麗,拒而不納。 五水之民附於高麗,執團練使十四人。 語在《高麗傳》中。 목종의 말년에, 아소( 阿疏)가 달기( 達紀)를 보내 변경 백성들을 속여 선동하였는데,  갈라전( 曷懶甸) 사람이 잡아 보냈다.  목종이 석적환( 石適歡)으로 하여금 갈라전을 어루만지고 거둬들이게 하려 하였는데, 시행치 못하다가,  목종이 졸( 卒) 하자, 이때에 이르러서야 보내었다.  이전에, 고려( 高麗) 와 통호( 通好/친분을 맺음)하였는데, 이윽고 틈이 상당히 벌어져,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의논할 일이 있다고 청하자, 사자를 고려에 보내었는데, 거부하고 들이지 않았다. 오수( 五水)의 백성이 고려에 붙자, 단련사( 團練使/당관제중 절도사의 예하관명) 14인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고려전(高麗傳)》에 그 말이 전한다. 금사 고려전中 ○ [석적환(石適歡)이] 떠나기 전에 목종(穆宗)이 몰(沒)하고 강종(康宗)이 왕위를 이은 뒤 다시  석적환(石適歡)을 파견 하여  성현통문(星顯統門) 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을리골령(乙離骨嶺) 으로 가서 군사를 더 모집하여   활열수(活涅水) 로 나아가  갈라전(曷懶甸)을 순행하여  배반한 7성(城)을 수습 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고려(高麗)에서 사람이 와,  “꼭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 고 통고하니. 갈라전(曷懶甸) 관속(官屬)인 사륵 상온(斜勒 詳穩)· 치자보 상온(治刺保 詳穩)등으로 하여금 [고려(高麗)로] 가도록 하자, 석적환(石適歡)도 배로(盃魯)로 하여금 [고려(高麗)에] 가도록 하였다. 고려(高麗)에서는 치자보(治刺保) 등은 잡아두고 배로(盃魯)는 돌려보내면서, “너와는 상대할 것이 없다.”  고 하였다. 이때  오수(五水)의 백성들...

고려군의 두만강 도하 가능성 (6)

  고려 문종조 오랜 태평세월과 치세로 국력을 비축한 고려는 1056년, 1080년 병력 3만을 파견하여 갈라전으로 진군한 예가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갈라전 지역이 고려에 복속을 청하게 됩니다. 물론 직접 관리를 파견하거나 그렇진 못하고요. 주현의 이름을 내려주는 선이었지요. 고려 문종조 여진1개 부락의 규모(호수, 인구, 병력등) 추정  http://cafe.naver.com/booheong/79996 고려 문종조 3만명의 여진 정벌군  http://cafe.naver.com/booheong/71967 이러던 상태에서 1102년 소해리를 격파한 목종(穆宗) 영가(盈歌)는 완안부족의 족제인  사갈(斜葛)을 고려에 파견하여 소해리를 격파했다고 알려주면서 통교를 시작합니다.  이 사갈이 갈라전을 통과하면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갈라전이 완안부로의 귀부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고려 임금은 문종의 아들인 숙종이었는데,  숙종은 갈라전이 완안부로 넘어갈까 걱정하여,  이를 중지하는 책략을 쓰게 됩니다. 금사 고려전中 ○ 소해리(蕭海里)를 쳐부순 뒤에는 알로한(斡魯罕)으로 하여금 고려(高麗)에 가서 승전을 통보하도록 하니, 고려(高麗)에서도 사신을 보내와 승전을 축하하였다. 얼마 안되어 또 사갈(斜葛)과 알로한(斡魯罕) 등으로 하여금 [고려(高麗)에] 가 빙문(聘問)하도록 하니 고려왕(高麗王)은, “사갈(斜葛)은 여직(女直)의 족제(族弟)이니 대우하는 예가 융숭하여야 한다.” 고 하며 큰 은반(銀盤) 한개를 주어 사례하였다.  그 뒤 갈라전(曷懶甸) 등 여러 부족(部族)들이 모두 [여직(女直)에] 귀부(歸附)하려고 하자 고려(高麗)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귀부(歸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갈라전(曷懶甸)이] 고려(高麗)에 가까워 불리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여 [여직(女直)에 귀부(歸附)하는 것을]...

고려군의 두만강 도하 가능성 (5)

  고려사 숙종 9년 1104년 1월 8일 기사中 계미일. 왕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간(林幹)을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선정전(宣政殿)에서 그에게 부월(斧鉞)을 준 후 가서 대비케 하였다. 또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위(李瑋)를 서북면행영병마사(西北面行營兵馬使)로, 위위경(衛尉卿) 김덕진(金德珍)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했다. 무자일. 서여진의 종곤(從昆)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판병마사는 일반적으로 종2품 이상의 재상이 임명되며, 병마사는 3품이 임명되지요. 행영은 임시로 조직된 부대를 뜻합니다. 하면 과연 개경에서 중앙군이 파병되어 정주로 향하였는가?  아니면 정주 인근의 진에서 병력을 빼내 정주에 합하였는가? 아니면 임간만이 정주에 파병되어 정주성의 병력만으로 싸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 그럼 당시 고려의 최동북방 동계에 편성된 13개 성에 배치된 병력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여진정벌전 동북면 13진 포진 + 병력 배치도  http://cafe.naver.com/booheong/89357 당시 고려 동계에 편성된 주진군은 총 32성 약 24000 병력입니다. 이중 최동북면 13성에 배치된 병력은 약 7000 이구요. 한편 이때 석적환의 병력이 사서에 파악되는 부분은 아래와 같이 두 군데가 있습니다. 금사 고려전 1104년 기사中 ○ [강종(康宗)] 2년 갑신(甲申)(1104)에 고려(高麗)가 쳐들어오자, 석적환(石適歡)이 크게 쳐부수어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고려(高麗) 국경까지 추격하여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4월에 고려(高麗)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石適歡)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闢登水) 에서 방어하여 또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闢登水)로 들어가 그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이에 고려왕(高麗王)은 “국경의 분쟁을 충동질한 자는 모두 [갈라전(曷...

고려군의 두만강 도하 가능성 (4)

  [봉오선생]님은 석적환(石適歡) 中  적환(適歡) 의 여진 발음이  [시훈][shi hoon]  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여진문사전에서 확인한 바로는  석(石) 의 발음은  [쉬][ʃĩ ]  입니다. 또한 워싱턴 대학의 Chad D. Garcia씨의 논문을 보면  석적환의 여진어는  Shi shi huan [쉬 쉬 후안] 이라고 하더군요. 즉 석적환의 여진 발음은  [쉬시훈], [쉬쉬후안]  이었고,  이를 고려인들이 지훈으로 표기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지조는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대략 이러지 않았을까요? 1104년 1월 6일 석적환이 기병을 이끌고 부내로의 1753명을 쫓아옴 정주의 고려  통역관  : 너는 누구냐? 석적환  :  <태사의 형제인 석적환이다.> <taifĩ ni  axu dou  ʃĩ   shi hoon> < 타이 수 니 아후 도우   쉬! 시! 훈!> 정주 도령 (현 대령급) : 야 뭐라고 하냐? 통역관  : 공의 형인 지훈이라고 하는뎁쇼! 정주 도령  : 고래? 공형 지훈?  물론 추측일 뿐입니다. 혹여나 공형이 1106년 1월에 입조한 공아(公牙)일 수도 있습니다. 고려사 숙종 9년 1104년 1월 6일 기사中 신사일. 동여진(東女眞)의 남녀 1,753명이 귀부해 왔다. ○ 동여진의 추장(酋長) 오아속(烏雅束)이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지자   공형지조(公兄之助) 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騎兵)이 정주(定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고려사 예종 원년 1106년 1월 18일 기사中 신해일. 동번(東蕃)의  공아(公牙)   등 10명이 입조해 오자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