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거사실패로 숙청된 주요 인사들로는 군부에는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윤성, 한경, 윤선 장군 고석, 박영, 송인, 사유정, 오정신, 이녹천, 김단, 김언, 송행충, 유한경 중랑장 홍입공 낭장 이유, 정총진 별장 이작, 장성호 등이며, 조정인사로는 내시 왕관, 최잠, 김찬, 안보린 원외랑 박원실 좌복야 홍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시어사 이중 기거사인 호종단 지추밀원사 김진 등입니다. 특징적인 점은 조정인사에 고위관료는 거의 없었으며, 내시들이 난을 주도하였으며, 그날 궁성 숙직을 하던 조정 인사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즉 조정의 고위관료는 이자겸에게 이미 포섭된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군부인사로는 고려에 존재하는 16명의 상장군,대장군 중에 6명이 난에 가담하였으며, 장군도 10여명이나 관련된 점입니다. 그러나 군부의 장성 16명이 가담한 거사치고는 동원 병력이 적었으며, 이자겸 일파에 낭장급(現 영관급) 지휘자들이 가담한것으로 미루어 보아, 장성급들은 이자겸에게 반발하였으나, 중간 지휘자들은 이자겸 일파에 장악되거나 중립을 지킨것으로 보입니다. 이 실패한 거사로 자칫 고려는 사직의 문이 닫힐 뻔 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이자겸이 선위조서를 받아 들여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4부에서 계속- 4부 다음편은 5부에서 끝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후엔 예정대로 이의민과 이성계편을 이어가겠습니다. ---------------------------------------------------------------------------------------- 1126년 2월26일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몇일이 지나 3월이 되자 이자겸은 자기집 중흥택 서원(西院)에 인종을 감금시킵니다. 이때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자겸 부자의 오만불손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요. 임금의 호위무장들을 죽이려고 이자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