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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2의 게시물 표시

견훤 상부(X) 상보(O)에 관한 짧은 글

  고려사 王以萱,十年之長,稱爲尙父 왕은 견훤이 10년 연장으로써 칭하여 상보(尙父)라 하였다. ​ 父 -아비 부 -자 보(≒甫, 남자에 대한 미칭) ​ 결론 1. 직역 : 상보(높이는 尙 남자에 대한 미칭 父 ) 2. 임금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각별한 신하에게 내리는 호칭 (예:강태공) 3. 아버지 부(父)하곤 관계가 없음 ​ -상식적으로 10살 많다고 아버지뻘이라고 하진 않잖아요 ^^; ​ 예외적인 금석문이 있긴 합니다. 고려사 열전에 상보로 기록된 최선필은 939년 금석문에 國父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국부라 읽어야 맞는듯싶습니다.

동북 9성이 정녕 그렇게 작은가

  요즘 제가 연재하고 있는 동북9성 길주이남설에 대해서 손바닥만 한 땅이라고 하시는 분이 계셔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위치가 정확히 나와 있는 곳은 4개성 정도 되는데, 그중 고려 관문 정주와 길주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고려사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더구나 개척한 땅이 너무 넓어서,  9성이 서로의 거리가 요원하고 , 골짜기와 동네가 깊고 멀어 적은 복병을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 여진 정벌 당시 고려 최전방 관문인 정주에서 길주까지 거리를 길공구가 대충 거리를 재보겠습니다. 출처 : 구글맵, 다음지도 약 200km인데요, 서울에서 전주까지 거리와 비슷하네요. 진짜 손바닥 만한가요?

이걸 보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걸 보면 저게 맞는 것 같고...

  요즘  동북9성 위치 비정 에 대해서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토대로 위치를 비정해 보니  길주이남설 이 타당하더라고요. 또 존경하는 안정복 선생도 길주 이남설을 주장하셨더군요. 헌데 길주가 그 길주냐? 라는 의문에 당연히 길주가 그 길주 아니겠냐? 라고 생각하였는데, 어~ 아닐수도 있게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해서 한치윤 선생의 해동역사를 자세히 읽어보고 또 위치를 비정하다 보니까 이것도 맞는 말 같아요. 한치윤 선생 은 영주 척벽기의 300리와 금사의 합라로총관부 이남 500리, 상경회령부에서 1800리 실제로 각 지역의 km를 측정해 보니까 얼추 맞는 겁니다 -0- 어 거리로 위치를 비정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또 들더군요. 해서  마천령 이남 , 즉  단천이남설 이 맞는 거예요. 한데, 헛소리로 치부했던 일제 초기에 주장되었던  함흥평야설 ....... 이게 일제가 처음 주장한 게 아니더라고요. 조선 팔도를 직접 걸어 다니며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선생 의 위치 비정이 또 있더라고요. 이것을 보니 다시 함흥평야설, 정확히는  홍원이남설 도 맞는 듯이 보여요. 함흥평야설에서 위치 비정한 산성들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는데, 김정호 선생의 홍원이남설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게다가  봉오선생  이란 분의 글을 어제 접하고 이것도 읽어보니  이분의 박학다식함이 엄청나더라고요. 항간에는 이분이 만주원류고를 번역하셔서, 일명 환빠? 유사학을 다루는 게 아니냐? 하던데 그분 카페에 가서 몇몇 글을 읽어보니 절대 유사학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글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분이 만주어와 고려 말 수복했던 지명의 발음 관계 등을 따지며 위치 비정한 것을 살펴보니 또  홍원이남설 도 일리가 있더란 말입니다. 이병도 씨도  함흥평야설 을 ...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13)

  인종은 척준경의 죄가 실린 모든 관부의 문서를 모두 태우게 하였으며,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자, 임금의 뜻을 어기는 자는 죄를 묻겠다고 하는 등 척준경을 복권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19년후, 인종은 승하하시기 직전에 척준경의 관직을 추복하였으며, 그 자손들까지도 벼슬을 줘, 끝내는 20여년전의 은혜를 되갚습니다. 얼마뒤 인종도 생을 마감하시게 됩니다. 1146년 2월 기사中 ㅇ 척준경(拓俊京)의 문하시랑 평장사의 관직을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지방의 한미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무뢰배 생활을 하다, 계림공의 눈에 띄어 계림공 사저에서 격구등으로 소일하던 척준경.  그의 인생은 계림공이 숙종으로 등극하면서 급변, 하찮은 말단 임시 공무원에서 전쟁영웅으로. 어제의 동지들이 하나둘씩, 패전의 책임을 물고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뿌리칠수 없는 유혹의 손길 권신 이자겸. 그리고 궁궐을 불태우는 반역의 장! 이어지는 임금님의 간절한 요청에 충정은 요동치고. 결단의 칼을 뽑아 권신을 제거하고는 끝내 토사구팽을 묵묵히 받아들인 그. 죽음을 두려워 않는 의리의 사나이이자, 충정의 장수였지만, 권세에 흔들렸던, 어찌보면 인간적이였던 일명 "소드 마스터 척"은 그렇게 천년전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사라져 갔습니다. -------------------------------------------------------------------------------------- 드디어 끝이 났군요. 워낙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인물이다 보니 굉장히 글이 길어졌습니다.   다음에는 되도록 간단히 열전을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12)

  금나라가 물러가자 송은 다시 금 내부 교란을 획책하고, 그와중에 고려에 이와같은 서신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수백만 군사 동원은 고사하고, 이런 일련의 행위는 금의 분노를 사게돼, 결국 몇달후 재침공을 받아 송나라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상황제 휘종, 황제 흠종등 황족 3000여명이 인질로 잡혀가게 되면서, 송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그후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이 양자강 이남으로 탈출해 남송을 세우게 되지요.   만약 송나라가 금나라에게 세금을 꼬박꼬박 바쳤다면 북송은 멸망하지 않았을까요? 고려가 금나라와 사이좋게 지낸것을 보면, 세금만 제때 내고 어설픈 계략만 부리지 않았다면 북송은 멸망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마지막으로 고려조정으로 돌아갑니다. 1127년이 되자 고려 조정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묘청과 인종의 만남이었습니다.   1127년 3월 기사中 ㅇ 서경의 요망한 중 묘청(妙淸)과 일자(日者/점쟁이) 백수한(白壽翰)이 왕을 달래어 상안전(常安殿)에 관정도량(灌頂道場)을 설치하였는데, 그 술법이 허황하여 알 수 없었다. ㅇ 왕이 왕비 및 두 공주와 함께 흥복사(興福寺)에 행차하였다가 재신과 추신 및 가까운 신하들과 누선을 대동강 중류에 띄우고 잔치하고 즐기었다. ㅇ 정당문학 김부일(金富佾)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을 강론하고, 또 승선 정항(鄭沆)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열명(說命)과 주관(周官)을 강하게 하였다. ㅇ 정지상에게 명하여 서경의 무일(無逸)을 강론하고, 또 시종과 서경 유신(儒臣) 25명에게 시를 짓게 하고 술과 음식을 내렸다.   위글을 읽어보면, 드디어 조정에 새로운 세력들이 나서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외부적으로는 송나라는 멸망 일보직전이었고, 이에 금나라에 대한 충성맹세를 통해 변방이 안정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오랜 골치였던 이자겸등 권신을 ...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11)

  한편 이자겸이 숙청된 1126년 6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척준경은 인종에게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됩니다. 6월에는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되고, 부인 황씨는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에 봉해집니다. 또한 11월에는 고려 신하의 최고의 영예인, 공신각에 척준경의 화상이 걸리게 되기도 합니다.   또 6월에는, 신하들의 요청에 의해 두 왕비(이자겸의 딸들)를 폐하게 되고, 문하시중 임원후(任元厚)의 딸을 황후로 삼게 됩니다. 이분이 훗날 의종 즉위후의 공예태후(恭睿太后)십니다.   고려사에는 이 대목에서 인종과 척준경의 일화를 삽입시켰더군요. 예전에 인종이 척준경에게 묻기를 "짐이 꿈을 꾸었는데, 깨 닷되와 해바라기 씨 세개를 얻는 꿈이었다. 경은 무슨 뜻이라 생각하는가?" "신이 알기로 깨는 한자로 임(荏)이요, 임은 임(任)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자 성을 가진 황후를 맞을 징조이며, 그 수가 닷되라는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또한 해바라기의 한자는 황규(黃葵)요,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으니,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라 하였다.   정말로 놀라운 꿈 해몽이 아닐수 없습니다. 실제로 인종은 임씨 성을 지닌 황후를 맞아들였으며, 다섯 아들을 두었고, 이중 세아들이 등극하게 됩니다. 세아들은 의종,명종,신종입니다.   어느분의 글을 읽어보니, 무식한 척준경이 그런 해몽을 했을리가 없다. 최사전이 대신 해몽해 준것이다고 했지만, 일단 분명히 고려사에는 척준경이 해몽한것으로 나와있습니다.^^; 이를 따르면 척준경도 상당한 지적능력을 지니...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10)

  1126년 5월 기사中 ㅇ 척준경이 김향과 함께 상위 장군(上衛將軍) 7인과 서리와 종들 20여 명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나오니, 창졸간의 일이기에 아무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어, 각기 목책의 나무를 뽑아서 몽둥이를 만들어 가지고 금오위(金吾衛) 남쪽 다리로부터 대궐로 들어가니, 조의(趙毅)가 맞이하면서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하며 들어가자, 곧 광화문(廣化門)을 닫아버렸다. 이공수(李公壽)가 뒤따라 이르자 왕이 한쪽 문을 열어 그를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공수는 바로 이수(李壽)이다. 이때에 순검 도령(巡檢都令) 정유황(鄭惟晃)이 백여 명을 거느리고 군기감에 들어가 무기와 갑옷을 나눠 주고, 연경궁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소경 유원식(柳元湜)을 만났는데, 그 말이 불순하자 즉시 죽였다.   ㅇ 척준경이 갑옷을 입고 급히 궁궐로 들어가니, 왕은 천복전(天福殿) 문에 나와 척준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척준경이 왕을 모시고 나오는데 이자겸의 무리가 활로 척준경을 쏘았다. 척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한번 호통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왕이 군기감으로 들어가 군사를 시켜서 호위를 엄중히 하고, 척준경이 승선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이자겸을 부르니 이자겸이 소복을 하고 왔다.   척준경이 칼을 한번 빼어 들고, 호통을 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역시 척준경의 무력이 남다르긴 남달랐나 봅니다.^^ 한편 "이자겸이 소복을 하고 왔다."는 이점에서 두가지 상황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자겸이 군사를 시켜 인종을 살해하려는 기도를 하는 상황에서, 미리 인종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소복을 입고 나타난 경우이고. 둘째는, 이자겸이 척준경이 인종을 보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체념하고, 소복을 입고 나타난 경우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상황의 경우, 궁궐밖에는 이자겸을 옹호하는 군부세력들과 사병들이 있었는데, 척준경의 일,이백 군사들을 두려워하여 순순히 자신의 목숨을 인종에게 내주는 상황은 언뜻 이해가...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9)

  1126년 4월 기사中   ㅇ 정응문(鄭應文)과 이후(李侯)를 금 나라에 보내어 신(臣)이라 일컫고 표문을 올리기를, “대인(大人)이 전통을 이어서 사방에 위엄을 떨치니, 다른 나라들이 조하(朝賀)하려고 이역만리를 건너오거늘 하물며 국경이 접해 있으니 정성을 바치는 마음 더욱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천품이 영명하셔서 덕업을 날로 새롭게 하시어 제왕의 조령이 발표될 때마다 모든 백성이 기뻐하지 않는 자 없으며, 위력이 미치는 인근의 적국이 감히 거역하는 자 없으니, 진실로 제왕의 위대한 능력이시며 천지도 은연히 보호하는 바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소국의 미약한 몸과 변변치 못한 덕으로 위대한 공적을 듣고 경모하는 마음이 간절한 지 오래였으니 약소한 물건으로 충성과 신의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비록 변변하지 못한 예물임을 부끄럽게 여기나, 넓은 도량으로 받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ㅇ 금 나라에서 회답하는 조서에, “짐(朕)은 생각하노니, 망하여 가는 것은 없애 버리고, 보존되는 것을 견고히 하는 것은 제왕의 할 일이며,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사직을 보존하는 도리이다. 훌륭하고 큰 인물은 시기를 따라 변통할 줄 아는 원대한 사업을 품는 것이다. 경은 집안이 왕작(王爵)을 전하고 대대로 영토를 누려 왔는데, 글을 올려 존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고, 토산물을 공납하는 예절을 다하였으며, 이어 낮은 칭호를 사용하였으니, 최고의 예의로 섬기는 뜻을 알겠노라.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았고 예물로 회유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왔으니 역시 좋은 일이 아닌가. 또 군부(君父)로서의 나의 마음이 이미 두터우니, 신자(臣子)로서의 의리를 너는 쉽게 잊지 말라." 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금나라의 맹약은, 몽고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하게 될때까지, 100여년 동안 굳건히 이어지게 됩니다. 매년 정월이면 서로 사신을 통해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보물등도 주고 받게 되지...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8)

  이날 거사실패로 숙청된 주요 인사들로는 군부에는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윤성, 한경, 윤선 장군 고석, 박영, 송인, 사유정, 오정신, 이녹천, 김단, 김언, 송행충, 유한경 중랑장 홍입공 낭장 이유, 정총진 별장 이작, 장성호 등이며,   조정인사로는 내시 왕관, 최잠, 김찬, 안보린 원외랑 박원실 좌복야 홍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시어사 이중 기거사인 호종단 지추밀원사 김진 등입니다.   특징적인 점은 조정인사에 고위관료는 거의 없었으며, 내시들이 난을 주도하였으며, 그날 궁성 숙직을 하던 조정 인사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즉 조정의 고위관료는 이자겸에게 이미 포섭된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군부인사로는 고려에 존재하는 16명의 상장군,대장군 중에 6명이 난에 가담하였으며, 장군도 10여명이나 관련된 점입니다. 그러나 군부의 장성 16명이 가담한 거사치고는 동원 병력이 적었으며, 이자겸 일파에 낭장급(現 영관급) 지휘자들이 가담한것으로 미루어 보아, 장성급들은 이자겸에게 반발하였으나, 중간 지휘자들은 이자겸 일파에 장악되거나 중립을 지킨것으로 보입니다. 이 실패한 거사로 자칫 고려는 사직의 문이 닫힐 뻔 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이자겸이 선위조서를 받아 들여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4부에서 계속-     4부 다음편은 5부에서 끝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후엔 예정대로 이의민과 이성계편을 이어가겠습니다. ----------------------------------------------------------------------------------------   1126년 2월26일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몇일이 지나 3월이 되자 이자겸은 자기집 중흥택 서원(西院)에 인종을 감금시킵니다. 이때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자겸 부자의 오만불손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요. 임금의 호위무장들을 죽이려고 이자겸...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7)

  4. 불타는 궁궐 ○ 내시 박심조(朴深造)라는 자는 승중(昇中)의 아들이다. 궁중 뒷간으로 빠져나와 분뇨가 잔뜩 묻었다. 지름길로 이자겸의 집에 가서 궁중의 사정을 고하니, 이자겸이 의관을 주어 그를 위로하였다. 척준경이 소억을 보내어 이자겸에게 말하기를, “오늘 저물면 적이 밤을 타서 몰래 출동할 듯하니, 그들이 행동하기 전에 궁문에 불을 지르고 수색하여 체포함이 어떠하냐." 하자, 이자겸이 이지미를 시켜 평장사 이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궁궐이 서로 나란히 서 있어, 만일 불이 나면 불을 끄기 어려울 것이니 매우 옳지 않다." 하였다. 척준경은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소부감(少府監)에 있는 황회목(黃灰木)과 장작감(將作監)에 있는 서까래들을 가져다 동화문(東華門) 행랑에 쌓고 불을 지르니, 바람에 불길이 날리어 삽시간에 내침에까지 불이 타 들어가, 궁인들이 놀라서 숨었다. ○ 저녁이 되어 척준경과 이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춘덕문(春德門)에 이르니, 문을 지키던 내시 이숙신(李叔晨)이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하였다. 척준경이 좌액 문으로 들어가니, 금위 별장(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빼어 들고 쫓아오자, 척준경은 물러나 달아났다. 이작이 손으로 문을 닫으니, 척준경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죽이라." 하였다. 지추밀원사 김진(金縝)이 숙직소에 있다가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고지식하고 변통성이 없어 세력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이자겸, 척준경과 사이가 나쁘니, 나가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따르던 사람들을 시켜 문을 닫고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밤에 왕이 걸어서 산호정(山呼亭)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김인존(金仁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시종은 모두 흩어지고,...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6)

  1123년 인종즉위후 단행된 조정인사에서 척준경은 종2품 참지정사 및 정3품 이부상서에 임명되어 탄탄대로를 걷게 됩니다. 인종 원년 1123년 12월 기사中 ○ 김지화(金至和)를 판병부사에, 임유문(林有文)ㆍ최홍재(崔弘宰)를 문하시랑 평장사에, 김약온(金若溫)을 중서시랑 평장사에, 척준경(拓俊京)을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박승중(朴昇中)을 추밀원사에, 김인규(金仁揆)를 동지추밀원사에, 이자덕(李資德)을 추밀원부사에 임명하였다. 게다가 이자겸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또 다른 세력이던 최홍재를 1124년 2월에 숙청시키는데, 이때 또한 척준경은 깊숙히 관여하게 됩니다. 인종 2년 1124년 2월 기사中 ○ 동지추밀원사 최홍재를 승주(昇州) 욕지도(褥地島)로 귀양보냈다. 최홍재는 무관 집안 출신으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잘하여 여러 번 종군하였다. 지위가 높아지자, 권세를 부리고 교만해졌다. 이때 이자겸은 교만하고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면서 스스로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음을 알고 항상 자기를 해치려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면서 홍재를 심히 의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무인으로 권인(權因)이란 자가 그 뜻을 알고 이자겸에게 말하기를, “홍재가 장군 정정숙(鄭旌淑)과 이신의(李神義)와 음모하여, 장차 영공에게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물으니, 척준경이 말하기를, “홍재는 사람됨이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그렇지 않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자겸이 비밀리 왕에게 아뢰어 최홍재를 귀양보내고, 또 정정숙과 이신의와 최홍재의 아들 최상(崔翔)ㆍ최온(崔溫)ㆍ최단(崔端)과 중 도휴(道休)와 최온의 장인 노영거(盧令琚)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그해 12월 조정개각에서 척준경은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승진임명됩니다. 인종 2년 1124년 12월 기사中 ○ 임유문(林有文)을 치리공신 검교태보 수태위 판상서호부사(致理功臣檢校太保守太尉判尙書戶部事)에, 김약온(金若溫)을 검교사도 수사공 문하시...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자 (5)

  당시의 요나라는 국외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서남쪽에서는 송이 국력을 회복하여, 북진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며, 동남쪽에서는 금이 강병을 이끌고 변경을 침략하였고, 1116년 3월에는 동경에서 발해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유수 소보선(蕭保先)을 죽이고, 발해유민 고영창(高永昌)을 황제로 옹립하고 국호를 대원(大元), 연호를 융기(隆基)라 칭하였습니다. 당시의 거란의 유일한 동맹국은 고려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태조 왕건의 유훈에 따라 실상은 거란을 원수로 여기고 있었지요. 급기야는 1116년 4월에는 각종 공문서에서 요나라의 연호를 삭제토록 지시까지 내리게 됩니다.   1116년 8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8월에 금(여진족)이 요(거란족)의 내원,포주(평북 의주 부근) 두성을 공략하여 거의 함락직전에 이르자, 당시만 해도 여진족을 속국으로 여기던 고려조정은 다음과 같이 금나라에 사신을 보냅니다. <포주는 원래 우리나라 옛땅이니 돌려보내기를 원한다.> 이에 아골타가 보낸 답서에 고려는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금 나라 임금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스스로 빼앗으라."고 하였다.>   해가 바뀌어 1117년 3월까지 항거하던 내원,포주의 거란족은 배 140척을 이끌고 해상으로 탈출하면서, 고려에 내원,포주의 두성을 고려에 넘긴다는 통첩을 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이에 영덕성의 고려군이 두성을 접수해 버립니다. 이에 만조백관이 두성을 회복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금임금 아골타는 사신편으로 고려 조정에 아래와 같이 글을 보냅니다.   1117년 3월 기사中 금 나라 임금 아골타가 아기(阿只) 등 5명을 시켜 글을 부쳐 보냈는데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고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