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9)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이성계 일족이 당시 여진땅이었던 [갈라전], 여진어로 [하라 온/카라 온]에 살던 시절 불렸던  여진+몽고 이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 이성계의 조부 이춘 -고려 이름 : 이춘(李椿) -한문명 :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 -갈라전 시절 인명 : 바얀 터무르[bayan temur] -뜻 : 부철( 富鐵) /  부자 쇠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도조(度祖)의 휘(諱)는 이춘(李椿)인데, 어렸을 적의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蒙古)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 이다.    흠정원사어해 9권中 巴延特穆 爾 巴延富也特穆爾鐡也 卷三十四作卜顔帖木兒 卷一百七作 孛顔帖木兒 俱係宗室諸王 卷十八作不顔帖木 而卷十九作伯顔帖木而 卷二十六作不顔鐡木兒 卷四十二作伯顔帖木兒非一人併改 파연(巴延)  특목이( 特穆 爾) 파연(巴延)은 부(富)다. 특목이(特穆爾)는 철(鐡)이다. 34권(卷)에는 복안(卜顔) 첩목아(帖木兒)라 작( 作)하였고, 107권(卷)에는  발안(孛顔) 첩목아(帖木兒) 라 작( 作)하였는데, 모두 종실(宗室)의 제왕(諸王)에 계( 係)한다. 18권(卷)에는 부안(不顔) 첩목(帖木)이라 작( 作)하였고,  19권(卷)에는 백안(伯顔) 첩목(帖木)이라 작( 作)하였고, 26권(卷)에는 부안(不顔) 첩목아(鐡木兒)라 작( 作)하였고, 42권(卷)에는 백안(伯顔) 첩목아(帖木兒)라 작( 作)하였는데,  1인( 人)이 아닌데, 병개(併改/모두 고침)한다. 바얀 터무르[bayan temur] 바얀은 부유하다는 뜻이고,  터무르는 철 (쇠)이 라는 뜻이다. (원사)  34권에는 복안 첩목아, 107권에는 발안 첩목아라 쓰여 있는데 모두 종실 여러 왕에 관계한다. 18권의 부안 첩목, 19권의 백안 첩목, 26권의 부안 첩목아, 42권의 백안 첩목아라 쓰여 있는데 같은 사람이 아니고  (동명이인으로)  모두...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8)

  흠정원사어해 9권中 伊蘇布哈 伊蘇九數也布哈 牤牛 也卷一百七作也速 不花 昆布哈 昆人也布哈 牤牛 也卷二作口温 不花 -분석 몽고어로 부카, 흠정원사어해에는 부하, 만주어로는 무하샨[muhaxan] 흠정원사원해에는 타스[tas]가 굳센 성품이라 해석 현 몽고어의 타스는 큰 수리(매과)로 만주어로는 아얀 타스하리[ayan tashari] 즉 타스 부카는 모두 몽고어이다. 몽고어 : 타스 부카[tas buka] 만주어 : 망아 무하샨[mangga muhaxan] / 힘쎈 황소           or 아얀 타스하리 무하샨[ayan tashari muhaxan] / 큰 수리 황소 ※결론 → 이성계의 큰 아버지 이자흥의 갈라전 시절 이름은 몽고어로   타스 부카[tas buka] 이며             뜻은  굳센 황소 란 뜻이다. -3부에서 계속-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7)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이성계 일족이 당시 여진땅이었던 [갈라전], 여진어로 [하라 온/카라 온]에 살던 시절 불렸던  여진+몽고 이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할아버지 이춘 [부얀 터무르] 2. 이성계의 큰 아버지 이자흥   -고려 이름 : 이자흥(李子興) -한문명 : 탑사불화(塔思不花) -갈라전 시절 인명 : 타스 부카[tas buka] -뜻 : 굳센 황소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자흥(子興)이니, 몽고 이름은  탑사불화(塔思不花) 이고,  다음 아들은 곧 우리 환조(桓祖)이다. 흠정원사어해 9권中 塔斯特穆爾 塔斯性烈也特穆爾鐡也卷一百七作答帖木兒係宗室諸王卷三十四作太 帖木兒卷四十六作塔思帖木兒非一人併改 탑사특목이(塔斯特穆爾) 탑사(塔斯)는  성열(性烈) 이다. 특목이(特穆爾)는 철(鐡)이다. 107권(卷)에는 답(答) 철목아(帖木兒)라 작( 作)하는데  종실(宗室) 제왕(諸王)에 계( 係)한다. 34권(卷)에는 태(太) 첩목아(帖木兒)라 작( 作)하였고, 46권(卷)에는  탑사(塔思)  첩목아(帖木兒)라 작( 作)하였는데, 1인( 人)이 아니며 병개(併改)한다. 타스 터무르[tas temur] 타스는  굳센 성품 을 뜻한고  터무르는 철이다. 107권의 답 첩목아라 쓰여 있는데 종실의 여러 왕에 관계한다. 34권에는 태 첩목아, 46권에는 탑사 첩목아라 쓰여 있는데 1인이 아니며 모두 (통일하여) 고친다. 흠정원사어해 3권中 庫庫布哈 庫庫青色也布哈牤牛也卷一百六十六作濶濶不花部名 고고포합(庫庫布哈) 고고(庫庫)는 청색(青色)이고, 포합(布哈)은  망우(牤牛/황소) 다. 166권(卷)에는 활활(濶濶)  불화(不花) 라 작( 作)하였는데 부명( 部名)이다. 쿠쿠 부하[kuku buha] 쿠쿠는 청색이고, 부하(부카)는 황소다. 166권에는 활활 불화라 쓰여 있는데 부족 명칭이다.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6)

  P.S) (구) 몽고문자 모음 (양성/중성/음성) (코르친 방언 기준)( 유원수 선생의 <몽골비사> 참고) -a[아] : 양성 -e[으어] : 음성   → 암묵적으로 [어]로 표기 -i[이] : 중성 -o[어] : 양성   → 암묵적으로 [오]로 표기 -u[오] : 양성   → 암묵적으로 [오]로 표기 -ö[워] : 음성   → 암묵적으로 [우]로 표기 -ü[우] : 음성   → 암묵적으로 [우]로 표기 *구 몽고문자에는 o와 u 표기가 같고,  ö와  ü 표기가 같습니다.  모음조화를 따릅니다.  대체로 양성모음 뒤에는 양성모음이나 중성모음이 옵니다.  오로스(O), 오루스(X), 우로스(X) *오로스나 우루스나 몽고어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난해한데다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3부에서 계속-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5)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이성계 일족이 당시 여진땅이었던 [갈라전], 여진어로 [하라 온/카라 온]에 살던 시절 불렸던  여진+몽고 이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할아버지 이춘 [부얀 터무르] 2부-큰 아버지 이자흥 [타스 부카] 위화도 회군 전 이성계 가문내역이 쓰인 신도비 이성계 여진족설은 이색의 글을 논파해야만 합니다.(실상 불가능) [이성계 여진족설]로는 절대로 깨지 못할 팩트 3.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고려 이름 :  이자춘(李子春) -한문명 :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갈라전 시절 인명 : 오로스 부카[ulus buka], 만주 발음 우루스 부하[ulus buha] -뜻 : 나라 황소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환조(桓祖)의 휘(諱)는 이자춘(李子春)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이다. 흠정원사어해 9권中 烏魯斯布哈 烏魯斯國也布哈牤牛也卷一百七作兀魯思不花係宗室諸王 卷八作兀魯 失不花卷十九作兀魯而不花卷一百三十五作兀魯不花非一人併改 오로사포합(烏魯斯布哈) 오로사(烏魯斯)는 국(國)이고, 포합(布哈)은 망우(牤牛)다. 107권(卷)에는 올로사(兀魯思) 부화(不花)라 작( 作)하였는데  종실(宗室)의 제왕(諸王)에 계( 係)한다. 8권( 卷)에는 올로실(兀魯 失) 불화(不花)라 작( 作)하였고, 19권(卷)에는 올로이(兀魯而) 불화(不花)라 작( 作)하였고, 135권(卷)에는 올로(兀魯) 불화(不花)라 작( 作)하였는데 1인이 아니며, 병개( 併改)한다. 오로스 부카[ulus buka] 오로스는 나라이고, 부카는 황소다. (원사)   107권에는 올라사 부화라 쓰여 있는데 종실의 여러 왕과 관계한다. 8권에는 올로실 불화, 19권에는 올로이 불화, 135권에는 올로 불화라 쓰여 있는데 1인이 아니며 아울러 고친다. -분석 몽고어로 오로스[ulus]는 만주어로 구룬[gurun]이며 나라(國)란 뜻이다. 오로스 부카는 순수 몽고어다. 몽고어 : 오로스 부카[ulus buka]...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4)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태조가 환조의 적장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하다 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태조의 종[奴]이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用事]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의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태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어  그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 결론 → 이천계의 이름은 요오주[yooju]로 여진어로 추정된다.             이씨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 이자춘이 다루가치가 된다.             이자춘의 뒤를 이어 이성계가 가통을 잇자 자신이 적통이었다는 이유로 태조에게 앙심을 품었다. p.s) 태조실록의  < 初桓祖薨, 天桂自以爲嫡嗣, 心忌太祖...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3)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이성계 일족이 당시 여진땅이었던 [갈라전], 여진어로 [하라 온/카라 온]에 살던 시절 불렸던  여진+몽고 이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할아버지 이춘 [부얀 터무르] 2부-큰 아버지 이자흥 [타스 부카] 3부-아버지 이자춘 [오로스 부카] 4. 이성계의 사촌 형 이천계 -고려 이름 :  이천계(李天桂) -한문명 :  교주(咬住), 아명. -갈라전 시절 인명 : 요오주[yooju] -뜻 : 불명. -이씨 가문의 적장자 이자흥의 아들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자춘이 임시로 다루가치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이천계가 다루가치가 되는 일은 그 후로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도조가 죽자 어린 교주 대신 임시로 환조 이자춘이 관직을 계승하다 지정(至正) 2년(1342) 임오 7월 24일에 도조가 훙(薨)하였다. 함흥부(咸興府)의 예안부(禮安部) 운천동(雲天洞)에  장사지내니, 곧 의릉(義陵)이다. 탑사불화(塔思不花)가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照勘)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正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9월에 탑사불화가 돌아가[卒]니, 아들  교주(咬住) 가 어리[幼]었다.  (중략) 지정(至正) 3년(1343) 정월에 원(元)나라에서, 조씨는 적실(嫡室)이 아니고,  교주(咬住) 는 유약(幼弱)하다고 하여,  환조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丁年)이 됨을 기다려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흠정원사어해 9권中 耀珠 卷一百七作咬住係宗室諸王卷十七作齩住非一人因無解義但改字面〉 요주(耀珠) 107권(卷)에는 교주(咬住)라 작( 作)하였는데, 종실( 宗室)의 제왕(諸王)에 계( 係)한다. 17권(卷)에는 교주(齩住)라 작( 作)하였는데, 1인이 아니다. 해의(解義/뜻을 해석함)할 수 없음으로 인( 因)하여,...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2)

  몽고어 : 울저이 부카 [ ö ljei  buka] 만주어 : 자라푼 무하샨[jalafun muhaxan] 한문 : 수 망우( 夀 牤牛) 음차 : 완자 불화( 完者 不花) ※결론 → 이성계의 작은 아버지 울저이 부카는 순수 몽고어로 오래사는 황소란 뜻이다. -완자불화  이씨 가문의 적장자 이자흥이 죽자 이복 동생 아하이(나해)는 친형 울저이 부카를 다루가치로 세우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이에 이자춘은 어린 조카 이천계가 적장자라며 원의 승낙을 받아 이천계가 장성할 때까지  임시 다루가치직을 맡는다.  이자춘은 즉시 이복동생 아하이를 살해한다.  울저이 부카는 목숨을 잃지 않았고 20여 년을 더 살다 1356년에 사망한다.  아들 이지는 태조를 따라 장수로도 활약하였고, 영의정으로 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완자불화(完者不花)는 영돈녕(領敦寧)으로 치사(致仕)한 이지(李枝)의 아버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1427년 1월 3일 기사中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한 이지(李枝)가 졸(卒)하였는데, 이지는 우리 태조의 종제(從弟)이다.  이지는 나이 8세에 부모를 여의고 외숙부(外叔父)인 익양군(益陽君) 왕기(王琦)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태조께서 잠저(潛邸)로 불러와서 두고 무양(撫養)하기를 심히 두터이 하여 상시 휘하(麾下)에 있게 하였다.  정사년에 태조께서 왜구(倭寇)를 해주(海州)에서 정벌할 때에 이지가 적진(賊陣)을 돌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왜구가 물러갔는데도 이지는 오히려 돌아오지 않으니 태조가 놀라서 말하기를, “이지는 어디 갔는가.” 하니, 마침 말을 달려와서 뵈옵는지라, 태조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고 하였다. 무진년에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할 때, 이지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날랜 기병(騎兵) 수백 명을  ...

조선에 들어서 나뉜 이성계 가문의 휘 (1)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이성계 일족이 당시 여진땅이었던 [갈라전], 여진어로 [하라 온/카라 온]에 살던 시절 불렸던  여진+몽고 이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할아버지 이춘 [부얀 터무르] 2부-큰 아버지 이자흥 [타스 부카] 3부-아버지 이자춘 [오로스 부카] 4부-사촌형 이천계 [요오주] 5. 이성계의 작은 아버지 완자불화 -고려 이름 :  없음 -한문명 :  완자불화(完者不花) -갈라전 시절 인명 : 울저이 부카[ ö ljei buka] -뜻 : 목숨 황소 / 오래사는 황소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순제(順帝) 원통(元統) 2년(1334) 갑술에 도조가 풍질(風疾)을 앓아 탑사불화(塔思不花)에게 관직을 전하고자 하니,  조씨(趙氏)는 그의 아들  완자불화(完者不花) 에게 이어 지키[承守]게 하기를 청하였다. 흠정원사어해 15권中 諤勒哲布哈 諤勒哲夀也布哈牤牛也卷二十六作完者不花 악륵철(諤勒哲) 포합(布哈) 악륵철(諤勒哲)은 수(夀)이고, 포합(布哈)은 망우(牤牛)다. 26권(卷)에 완자불화(完者不花)라 작( 作)하였다. 울저이 부카[ ö ljei buka] 울저이는 목숨이고, 부카는 황소다. (원사)  26권에 완자 불화라 쓰여있다. -분석 울저이[ ö ljei]는 몽고어로 목숨을 뜻하며 만주어로는 자라푼[jalafun]이다. 부카[buka]는 몽고어로 황소를 뜻하며 만주어로는 무하샨[muhaxan]이다. 즉, 울저이 부카 는 순수 몽고어로 [오래사는 황소]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육조는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 (3)

  판삼사공(判三司公 : 이성계)은 먼저 부인 한씨(韓氏)는 원신택주(元信宅主)로 봉해졌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은퇴한 경(卿)의 딸이다. 아들 방우(芳雨)는 전 예의판서(禮儀判書)이며, 방과(芳果)는 추충여절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推忠礪節翊衛功臣 奉翊大夫 知密直司事 兼 軍簿判書 鷹揚軍上護軍)이며, 방의(芳毅)는 중정대부 신호위대호군(中正大夫 神虎衛大護軍)이며, 방간(芳幹)은 전 군기소윤(軍器少尹)이며, 방원(芳遠)은 통직랑 예의정랑 지제교(通直郞 禮儀正郞 知製敎)이며, 방연(芳衍)은 종사랑 성균박사(從仕郞 成均博士)이다. 딸 둘이 있으나 모두 어리다. 후취(後娶) 강씨(康氏)는 보령택주(保寧宅主)를 봉해졌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이다. 아들 방번(芳蕃)은 고공좌랑(考功佐郞)이며, 방석(芳碩)은 군기록사(軍器錄事)이고, 딸은 대호군(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의 아들 경(卿)은 진사(進士)이며, 후(候)는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이다. 나머지 사(師) 부(傅) 보(保) 백(伯)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집에 있고, 차녀는 내부부령(內府副令) 임맹양(林孟陽)에게 시집갔다. 완산군(完山君 : 李元桂)은 문씨(文氏)를 재취(再娶)하여 아들을 낳았다. 양우(良祐)는 전 사복정(司僕正)이며, 천우(天祐)는 전 호군(護軍)이다. 딸은 전 중랑장(中郞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김씨(金氏)는 찬성사(贊成事) 용(鏞)의 딸이다. 아들 조(朝)는 진사(進士)이며, 서(曙)는 전 낭장(郎將)이며,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에게 시집갔다. 다음 두 아이는 모두 어리다. 동지공(同知公 : 李和)의 재취(再娶) 안씨(安氏)는 영동정(令同正) 종기(宗寄)의 딸이다. 아들 지숭(之崇)은 전 연경궁부사(延慶宮副使)이다. 노씨는 경원군(慶原君) 은(訔)의 딸이다. 아들 숙(淑)은 진사(進士)이며, 징(澄)은 별장(別將)이며, 다음 세 명은 모두 어리다. 딸 하나 역시 어리다. 판서(判書 : 방우)...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육조는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 (2)

  고려국 증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 이공신도비명 병서(高麗國 贈 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判典理司事 完山府院君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 榮祿大夫 判將作監事 李公神道碑銘 幷序)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다. 사도는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다.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다.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았다.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집주(內侍執奏) 인(隣)을 낳았다.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다. 장군 양무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다. 안사는 성품이 호방하여 천하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의주(宜州)의 수령으로 어진 정치를 펼쳤다. 인척 때문에 강릉부(江陵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살았다. 대개 그 곳의 풍속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으로 이곳 현령의 뜻을 거슬리자, 현령이 해(害)치려는 사실을 어떤 사람이 공(公)에게 알렸다. 공은 가족을 이끌고 몽고씨(蒙古氏)에게 달아났다. 몽고씨가 그를 남경(南京)에 살게 하고, 5천 호소(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삼았다. 다루가치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千戶) 행리(行里)를 낳고, 그의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원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자 천하의 병선(兵船)들이 우리나라에 모여들었다. 충렬왕(忠烈王)은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군함(軍艦)을 만들게 하고, 명장을 뽑아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남경천호(南京千戶)도 또한 원나라 조...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육조는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 (1)

위화도 회군이 벌어지기 1년 전에 목은 이색이 쓴 이자춘 신도비 <아들 성계(成桂)를 낳았다. 지금 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 완산부원군(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 三重大匡 判三司事 兼 判典農寺事 上護軍 完山府院君)이다. > < 판삼사(判三司) 인 아들이 있어서 공훈과 명망이 한 세상에 으뜸이며> 이성계는 판삼사에서 1388년 1월 15일 개각에서 수문하시중이 됨 위화도 회군은 1388년 5월 22일 벌어짐. 고려사 1388년 1월 15일 기사中 ○ 최영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이색(李穡)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신해년(1371)에 삼사공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제수받던 날에, 내가 사공(司空)으로 있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이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하문하기를  “ 문신인 색(穡)과 무신인 성계(成桂) 가 같은 날에 문하성(門下省)으로 들어왔는데, 조정의 여론은 뭐라고 하던가?”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긍(自矜)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에 비추어 보면 조정의 반열에 공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는다고 하겠지만,  나와 공의 우정이 마치 물처럼 담박하기만 하고, 오래되어도 서로가 공경하는 풍도를 보고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내가 감히 공의 부친을 나의 부친처럼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서 신도비(神道碑)의 명(銘)을 짓게 되었다.> 이성계의 부탁으로 이색이 이자춘의 신도비를 작성함. --------------------------------------------------------------------------------------------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 신도비(神道碑)는 『목은문고(牧隱文藁)』권15와 『동...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라고?? (4)

  <조선 개국 5년 후> 이공~ 이공~ 내 그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시오?                         자자 여기 와서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우린 친구 아니오이까? 전하??                          참 혼자 있고 싶다는데 뭘 이렇게 불러대십니까?                          그리고 개국할 때 날 불렀으면 내가 기꺼이 앞장서서 추대했을 텐데                          어찌 저 말장수 같은 놈들의 추대를 받으시었소? 이색 끼가!!! 말장수???  이성계 여진족설에 대한 상식적인 반대 의견 실상 이성계 여진족설을 들고 계신 분이  이색의 이자춘 신도비를 논파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끝-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라고?? (3)

  개인적으로는 이성계와 매우 친하였지만 끝내 정치적으로는 이성계와 함께 하지는 않았지요. 물론 조선 개국 후 죽기 1년 전에 이성계를 만나 즉위하는 날 왜 날 안 불렀냐며 어찌 말장수 같은 놈들에게 추대를 받았냐고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굽히는 것 같기도 한 말을 하긴 하였습니다. 이에 남은이 화를 내며 이색을 썩은 선비 놈이라 비난하였고 이성계는 남은을 꾸짖고 끝내 이색을 친구로 예로 대하여 전송하였지요. <위화도 회군 1년 전 어느 날> 이공~ 이공~ 내 부탁이 있소이다! 판삼사 무슨 일이오? 내 부친 신도비좀 써주오! 집안 내력 좀 불러보소! 우리 가문은 일찍이 무신정권 때 문극겸 공의 사위셨던 이린.... 어쩌다 부원배가 되시었소이까? 공도 아시잖소?                         몽고놈들이 쳐들어 왔을 때 최씨놈들은 섬에 짱 박혀서 백성을 내팽개쳤소!                         어쩔 수 없이 몽고 놈들에게 붙게 되었지만 아시잖소?                         우리 고조, 조부, 부친께서 충렬왕, 충숙왕, 선왕에게 어찌 대하셨는지!!! 좋소! 공과 나는 친구와 같으니 내 기꺼이 하겠소! <고려 멸망 직전 서슬퍼런 이성계 정권하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색> 이공~ 이공~ 어서 오시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자자 상석에 앉으시오!               ...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라고?? (2)

  목은 이색이 위화도 회군 1년 전에 이성계의 부탁으로 쓴 이성계 부친 이자춘의 신도비 위화도 회군 전 이성계 가문내역이 쓰인 신도비 이 신도비에는 이성계 집안 내력과  이안사와 충렬왕의 일화, 이춘과 충숙왕의 일화, 이자춘과 공민왕의 일화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의 이름이 안사, 춘, 자춘, 성계 그리고 이성계의 당시 아들 방언도 포함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목은 이색이 어떤 인물인지, 조선이 개국하고 개국공신들이 이색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실록 등을 참고하시고요. 위화도 회군 후 서슬 퍼런 이성계 치하 고려 조정에서도 이색은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中 이색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태조를 사저에서 만나다 11월, 이색(李穡)이 왕의 부름을 받고 폄소(貶所)로부터 서울로 돌아와서 태조를 사제(私第)에서 뵈오니,  태조는 몹시 기뻐하여 그를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앉아 술을 올리면서 ,  이색에게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이색이 모두 사양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그르게 여겼다.  매우 즐기고서 파(罷)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객지를 떠돌아다니다 결국 절에서 죽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393년 1월 21일 이색(李穡)이 와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謝禮)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395년 11월 7일 도평의사사에서 한산군 이색에게 쌀과 콩을 보냈으나 받지 않다 도평의사사에서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에게 미두(米豆) 1백 석을 보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395년 11월 24일 한산군 이색이 오대산(五臺山)에서 돌아왔다. 당초에 색(穡)이 외방으로 버림을 받았다가 종편(從便)하라는 은총을 입어  관동 지방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에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부르니, 색이 왔다.  임금이 친구의 예로 접대하고 조용하게 담화를 하고 술을 마시고 즐겼다.  나갈 때에는 중문까지 나가서 보냈다. 조...